내가 읽은 책들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김동진 著

라일락74 2021. 1. 4. 15:05

                                    호머 헐버트, 당신이 심은 대로

 

인터넷이나 SNS에 익숙해져 긴 시간 몰입하여 독서를 한다는 것이 어느새 쉽지 않은 중에 한 권의 책을 소개한다.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는 구한말 바람 앞의 등잔처럼 스러져가던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를 찾아와 교육과 선교에 헌신하면서 찬 서리 맞으면서도 아름답게 피어날 조선을 꿈꾸었던 헐버트 박사의 삶을 그린 책이다.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은 그가 남긴 업적들을 통해 기록영화를 보듯 생생한 감동으로 찾아온다.

 

  나의 母校 숭의여자중고등학교는 마펫 새뮤얼 선교사가 기독교 정신을 근간으로 하여 설립한 미션 스쿨이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학교에서는 청록색 표지에 심은 대로라고 쓰여진 두꺼운 책을 나누어주었다. 이 책자에는 학교 연혁 및 설립자, 학교 건물 등의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마펫 새뮤얼의 한국어 발음으로 표기한마포 삼열이라는 설립자의 이름을 보고 마포라는 性氏도 있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구한말의 외국인 선교사들과 기독교 학교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고종 황제는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의 원천무효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이위종, 이준, 이상설 3인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하였고, 이들을 지원하는 제4 헤이그 밀사로 밀명받은 헐버트는 일본제국의 감시망을 피해 서방 언론사들과 접촉하여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애국열사들의 행로에 관한 역사적 사건은 탐정소설을 읽을 때처럼 두근댐과 전율이 일었다.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헐버트를 아는지를 묻던 일본인 취조관에게 한국인이라면 그를 결코 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사실은 그가 한국의 독립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로서, 대한민국 독립 역사에 빠질 수 없는 공로를 세운 역사적 사실은 195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받았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콜레라의 창궐과 청나라, 일본 등 주변 국가들이 호시탐탐 조선 침략 야욕을 드러내는 등 국내외적으로 힘들었던 상황과 함께 조선은 개화의 물결로 일렁이게 되었다. 신학생이던 헐버트는 <은둔의 나라> 저자인 그리피스의 강의를 들으면서,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침 육영공원에서 근무할 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지의 나라인 조선에 파견되었던 스물세 살의 청년 헐버트는 기독교 복음 전파에 대한 희망과 새로움에 대한 기대에 흥분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중간 거점이던 일본에 들렀을 때 그들의 높은 문명 수준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헐버트는 도착지인 부산 포구에 대한 첫인상을 등대도 없고 온통 민둥산뿐이었다고 회고한다. 제물포를 거쳐 한양에 도착한 헐버트는 장로교 초대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와도 교류하게 된다. 청교도 가문의 후손으로 목사인 아버지와 다트머스대학 설립자의 후손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헐버트는 일찌감치 높은 수준의 교육적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유니언 신학대학에 다니던 중 조선에 오게 된 헐버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언어학과 역사, 문학과 음악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사용함에 있어 조선을 위해 예비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임오군란 이후 미국의 신문물과 제도를 견문하고 돌아온 보빙사절단은 고종 임금에게 서양식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이를 계기로 조선과 미국이 협력한 최초의 개화 사업이자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육영공원이 개교되었다. 헐버트는 대부분의 일상을 담아 어머니에게 자주 소식을 전하였는데 그중에는 서울에 대한 인상을 맑고 쾌적하며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원형극장 같은 곳이라고 묘사하였다. 흑백사진을 통해 본 130여년 전의 서울은 사방이 외사산과 내사산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고, 단층구조의 가옥들과 관아들이 주를 이루었을 테니 유럽의 원형극장처럼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의 육영공원 학생들이라 함은 조정 벼슬아치들이 대부분으로 f, v, th같은 발음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발음 교정을 해 주는 장면은 오늘날의 교실과 사뭇 비슷하여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다. 육영공원 교사의 월급은 조선 동전 5천 개의 가치에 해당되던 금화 1달러로, 환전한 동전을 집으로 옮기려면 스무 마리의 말이 필요했을 정도라고 하니 이러한 화폐유통 기록은 조선의 국제적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헐버트의 학술적 면모는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서양인들이 헐버트의 집을 도서관으로 불렀다는 것과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조선말로 수업을 하기 시작했을 정도로 언어학적 재능도 뛰어났다는 사실에서도 짐작된다. 헐버트는 고종을 비롯한 조선인들과 친분이 두터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외국과의 교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한글에 매료되어 조선의 역사,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고종이 방 중앙에 앉고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는 장면을 정교하게 묘사한 <임금 자신이 주관한 시험>이라는 그의 기고문에서는 신교육에 관심을 보인 임금의 고뇌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이렇듯 고종과 헐버트의 신뢰적 관계는 훗날 황제와 밀사라는 운명적 관계로 이어졌지만, 육영공원 담당 관리들의 예산 착복 관련 기고문에서처럼 관리들의 부패한 민낯을 보게 됨에 따라 그는 이러한 어두운 부분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계약 기간 만료 후 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교사 초빙 계약이 갱신되자 다시 조선으로 와 조선의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등 조선을 위한, 조선의 사람이 된다. 조선에 근대 서적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그는 자신이 직접 출판할 것과 특히 조선어와 기타 언어 사이의 유사성을 연구하면서 바로 이 한글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싶어 하였다. 그의 이러한 결기는 <사민필지>의 저술과 교과서 편찬 등의 결과물을 내놓기에 이르렀지만, 사사건건 바른말을 하는 헐버트를 달가워하지 않은 조정 수구파 중신들의 견제로 인해 헐버트는 1891125년 동안 머물렀던 조선을 떠나야만 했고, 이후 육영공원은 3년 뒤 폐교되기에 이른다.

 

 

 헐버트는 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정치적 현실, 문화, 풍광, 종교 등 약 70여 편의 글을 국외언론에 기고하는 언론 외교관의 역할도 감당하였다. 콜레라가 창궐하자 기독교 국가들이 도와줄 것을 호소하고 조선을 가로채려는 청나라와 일본의 횡포를 고발하였던 이가 23살 청년 헐버트라는 사실에 고맙기 그지없다.

그 무렵 헐버트는 아펜셀러, 마펫 선교사와 함께 조선의 석탄 광산의 실태 파악하기 위하여 평양을 방문하였는데, 이 부분에서 앞에서 언급한 숭의학교 설립자인 마펫 새뮤얼 선교사의 이름도 언급되고 있으나 어찌나 반갑던지 잠시 학창시절의 추억에 잠겨본다.

 

 헐버트의 조선에 대한 애정 어린 집념은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인 <한국사>를 저술하기에 이른다. 미국인인 그가 한국 역사를 탐구하여 단군 시대인 고대사부터 고종 시대인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총망라한 역사서를 집필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한글은 최고의 값진 민족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500년 동안 공식 문자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으로 더욱 고난을 받았다.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언급한 우리나라의 학자들도 있었지만 그나마 겨우 개화기를 지나 한글자강운동이 일어났을 뿐이다. 1891년 헐버트가 저술한 최초의 한글교과서인 <사민필지>에서는 자신들의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도외시하는 민족적 잘못을 깨달을 것을 주문하고 있다.

 

 헐버트가 육영공원에서 남긴 선구적 업적은 조선 말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소개한 일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저술한 것과 한글 창제 배경을 학술적으로 고찰하여 한글의 독창성과 세종대왕의 위대성을 밝혀낸 것이다라는 사실은 한국의 교육과정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글맞춤법이나 어법에 있어 의외로 잘못 사용되고 있음을 종종 보게 된다. 그리할진대, 외국인이 조선의 말과 글을 익히면서 한글 자모음의 과학적 조합과 표기법과 소리를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매우 독창적인 언어임을 입증하려 애썼고, 심지어 조선어가 영어보다 언어학적으로 우월한 것을 명쾌하게 이론적으로 설파하여 겨우 26세의 나이에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것은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

 

  선교사로서의 헐버트는 조선의 배불정책과 한글 창제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500년 전부터 한국의 복음화를 예비하셨다는 믿음을 전제로 조선의 복음화에 앞장섰다. 한글이야말로 기독교 교리를 쉽게 전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 수단이라고 여겼고, 나라의 미래를 Y 즉 청년(young men)에게 희망을 품고 YMCA를 출범시켰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횡포가 계속되자 고종은 연호를 바꾸고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어 국권 강화를 기했으나 왕비를 잃고 열강의 간섭과 친일파들의 위협에 놓여 있을 때, 헐버트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임금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는 우국충정으로 조선을 지키고자 했다.

 

 헐버트에게는최고의 한글학자이며 최초의 한국어학자라는 수식어도 따라온다. 일례를 들자면, ‘살다에서, 다람쥐는 달음박질에서 비롯되었으며, 한국어는 특히 동사가 잘 발달된 언어임을 피력했을 정도로 탁월한 식견을 지녔다. 구전되어오는 아리랑에 최초로 서양 음계를 붙였으며, 역사서인 <한국사>를 저술한 이가 바로 헐버트 선교사라는 사실 등은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의 조선을 위한 애국활동은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멈추지 않았다. 을사늑약 이후 조선이 굴욕의 세월을 보내게 된 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권력을 인정한 테프트-가쓰라 밀약이 결정적 배경이었다고 고발하였다. 용산 국립박물관 1층에 놓여 있는 경천사십층석탑은 민족신문인 대한매일신보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과 함께 헐버트가 구체적 증거를 제시한 기고문과 국제여론에 호소한 덕분에 일본 정부로부터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을 수 있었던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다. 이렇게 헐버트는 통감부에 항의하거나 미국공사관, 신문 기고를 통해 한국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등 민권을 위해서도 무던히 애를 썼다.

 

한국의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권리이며 이러한 한국을 미국이 책임지고 도와야 한다면서 일본의 한국 강점을 묵시적으로 인정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항의문을 보내 미국의 부당한 행위를 공론화시켰다.

헐버트에게는 한국의 독립을 돕는 과정에서 평생을 두고 가슴을 치는 일이 있었다. 고종황제가 내린 두 번에 걸친 특사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헐버트는 세 번째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상해에 예치한 황제의 내탕금을 꺼내 독립자금으로 써달라는 황제의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던 일로서, 이 역사적 사실은 하마터면 묻혀버릴 뻔했으나 글쓴이의 집요한 노력에 의해 관련 문서를 찾아냄으로써 진실이 알려지게 된 듯하다. 헐버트는 평생에 걸쳐 이를 되찾으려 했으나 일본의 눈치만 보던 영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비협조로 일본에 의해 인출된 내탕금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한다. 194280세가 되던 해 도둑맞은 고종황제의 내탕금을 되찾기 위해 이 돈을 찾아주는 대가로 계약금을 지불했던 킴버랜드라는 사람을 만났지만 결국 그로부터 서류 한 장 건네받지 못한 채 허사로 돌아가 버려 평생 풀 수 없는 멍에로 남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수십 평생 조선을 위한 그의 헌신과 사랑을 역사의 뒤안길에만 묻어둘 일인가. 배재학당 시절 헐버트와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났던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광복절 기념식에 헐버트 박사를 초청하였지만 오지 못했던 그는 이듬해 대한민국의 국빈으로 한국에 왔다. 그러나 아흔 살이 넘은 노구의 뱃길 여정은 수월하지 못하였고, 꿈에도 그리던 한국에 온 지 불과 1주일 만에 서거하고 만다. 정부는 헐버트 애도일을 선포하고 특별방송을 했으며 모든 언론이 우리의 은인, 아니 애국자를 잃었다고 특집 보도하였다. 죽어도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소망했던 그분은 평생의 바램 대로 양화진 언덕에 영면하여 누워있다.

 

  한글, 거북선, 역사기록 등 한국의 문화를 사랑했던 헐버트. 그분에게 붙여지는 선교사, 교육학자, 독립운동가, 언어학자, 역사학자요 운동애호가이며 출판가 등의 다양한 호칭들은 그가 남긴 방대한 업적의 결과이며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보물 같은 존재였다. “불멸의 은인 헐버트”, 이 말은 초대 부통령이던 이시영 박사가 헐버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말이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헐버트, 그는 미국인이면서 한국사회와 국가에 크나큰 유익을 주고 폭풍우 이는 바다의 등대처럼 살다 갔다.

 

 헐버트 박사 서거 70주년을 맞아 쓰여진 이 작품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보내주신 미국인 선교사의 국적을 초월한 범 인류애와 헌신, 객관적이고 세밀한 시각으로 바라본 조선의 일상들이 살아 숨 쉬듯 남겨져 있다. 著者는 이렇게 말한다. 우연히 헐버트에 대해 알게 된 후 그에 대한 고마움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호머 헐버트의 꿈은 그가 심은 대로 피어날 것이다. 양화진 언덕의독립유공자 헐버트의 묘비를 찾아갈 명분은 이미 충분하다.

 

 



호머 헐버트 박사(1863년 1월 26일 ~ 1949년 8월 5일)



사무엘 마펫 선교사(S. A. Moffet 1864-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