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40여년 전, 그리고 지금 - 친구 이길원

라일락74 2022. 1. 15. 20:26

2021. 11.

언제부터였을까.. 대학을 졸업한 지 벌써 43년이 흐른 만큼 긴 세월을 보내면서 매끄럽지 못하게 된 인간관계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왜 긴 한숨부터 나오는 지..

늘 보고 싶었고 늘 궁금했던 친구.. 길원 . 고등학교 1, 2, 3학년을 내리 같은 반을했던 길원이는 고2  수학여행을 갔을 때 같은 그룹을 하면서 친해졌지만 실상 고1때부터 눈에 띄는 친구였다. 고1때 길원이의 학급번호는 18번 , ㅋㅋ  정작 본인은 기억하지도 못할 수 있지만 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고3때는 짝꿍이기도 했고, 졸업 후 진학한 대학은 서로 달랐지만 똑같이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것만으로도 공유할 게 많은 사이였다.  70년대 초반 어려웠던 시절이었음에도 길원이가 선뜻 내게 준 영문학선집인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는 아직도 책꽂이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열정을 다 해 참여했던  4학년 졸업 영어연극의 제목은 '써머셋 모옴의 작품인 '더 써클' The Circle/ written by W. Somerset Maugham에서 나는 Elizabeth 역할을 맡아 열연했고, 같은 휴머니스회 써클회원이자 영문과 단짝이던 경혜는 Clive를 연기했었다. 마찬가지로 영문학도인 길원이도 자신의 학교에서 열렸던 졸업연극에인데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 Oliver Twist written by Charles Dikens에서 소년 Oliver 를 연기했다.  학교기숙사에서 1주일간을 합숙하며 영어 대사를 외우며  연극 준비를 했었다. 더블 캐스팅 double casting으로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어 대사 분량이 좀 많았지만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20세기 영국의 어느 귀족 부인 역할을 맡았던 나에게 연극을 관람하셨던 김복련교수님은 나의 영어발음과 연기에 대해 과찬을 해 주셨기에 우쭐했었다. 점잖은 신사 Clive역을 맡아 맑은 음성을 들려주었던 경혜 역시 영어발음도 좋았고 함께 출연한 과 친구들과 staff 로 도움을 준 김혜선은 정말 원어민 못지 않은 발음으로 칭찬을 받았던 기억들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런가 하면 1년을 휴학했던 길원이도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배역을 맡았었는데, 영어를 좋아하고 발음도 좋았던 길원이는 하얀색 셔츠에 멜빵바지를 입은 고아 소년 올리버로 분장하여 소설의 배경처럼 조금 어둡던 분위기의 무대에 올라 춤을 추는 등 열연을 펼치던 장면도 기억이 난다. ..  아.  정말 오랜 옛 추억이다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
 
The Circle」 서머셋모옴 1921년 작품
하얀색 드레스 분장한 나.. 
경혜도 함께 출연했던 추억 어린
4학년 졸업 영어연극
 연극이 끝난 후 숙연당(淑演堂)에서 공연을 보러와 준 길원이와 함께.. 당시 입었던 갈잎 그려진 셔츠와 청바지, 짙은 밤색 핸드백도 아직 눈에 선하다. 40kg에 불과하던 모습의 나.. 청색 스트라이프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찾아와 준 길원이.. .
 

 

 길원이와는 같은 본관인 한산 이씨(韓山 李氏)이기도 하고 인상이 좋은 아이라며 우리 엄마는 길원이가 우리집에 오는 걸 반기셨었다. 그런 친구가 우리집에도 자주 왔었지만 주로 내가 길원이의 집에 갔었다. 길원이가 회현동에서 살고 있었기에 명동 부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스무 살 초반이었던 까닭에 그 친구 집을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나 또한 당연히 그랬던 것 같다. 

  대학 1학년 초 모처럼 나간 미팅에서 하필 경혜와 내가 만날 수 있는 상대방 남학생이 모자라 그 미팅을 주선했던 서울의대 2학년이던 차상헌이 미안하다며 안절부절하다가 한국휴머니스트학생회라는 괜찮은 써클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그 바람에 경혜와 나는 휴니스트학생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길원이한테도 좋은 써클이라고 꼬셔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이번에 길원이네 집에서 해후한 다섯 명은 세 명의 선배들도 역시 휴머니스트학생회에서 만난 인연의 끈들인 셈이다. 74년부터 같이 활동하고 농촌봉사활동도 함께 참여했었는데, 너무 열성적이라 어느 순간 번아웃이 되었던지 길원이는 3학년 이후에는 써클활동에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대학 초년생으로 거칠 것 없던 20대 청춘에 시작했던 모임이라 마음 속 깊이 써클 회우들애 대한 그리움내지는 궁금함이 늘 있었던 것 같다.

 

 나름 개성이 강한 친구 길원이, 그녀는 그림을 잘 그려서인지 인테리어 감각이나 그릇 고르기  등에 있어 남달리 세련된 미적 감성을 지녔다. 대학 2학년 겨울 쯤이던가, 독일 시인 하이네의 짧은 詩 한 편을 4B 연필로 직접 쓰고 한 송이 꽃을 배경으로 굵게 터치한 그림을 그려 내게 주었다.   열아홉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어느 선배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가슴앓이 하던 나에게 사랑으로 인해 스러져가는 이의 마음을 담은 시(詩)를 담은 시화(詩畫)였는데, 실상 당시에는 길원이도 그 선배님을 내심 마음에 들어했기에 시샘 내지는 경쟁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응원한다며 내가 그 사람과 잘 되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참으로 싱싱하던 젊은 기억이랄까. 

 

 졸업 후 노르웨이대사관에 입사하여 수십년 간 근무하다가 몇 년 전 상무관으로 은퇴하고 자신이 꿈꾸던 집을 직접 지어 살고 있는 멋진 삶의 소유자 길원. 대사관에 근무했던 만큼 유창한 영어회화, 그리고 노르웨이 여행 등 가진 정신적 자산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동향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만큼 왕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연유는 잘 모르겠지만.. zz zz 

 살아보니 어떠한가.. 인생은 살만한 것인지.. 예기치 않게 마음에 상처가 생기곤 하지만 잠시 참으면 될 뿐인데 이렇게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서조차 앙금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참 못된 것 같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고 하던가..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덕분에 사람을 찾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기 때문인가.  길원이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긴 했다. 도대체.. 수십 년이 지나 60대중반이 훨씬 넘은 중년에 이르러서야..말이다. 휴머니스트회 74학번 동기인 김시환이 맛있는 밥을 사 주면서 길원이와의 만남을 끄집어 냈던 것이다.  한국은행을 다녔던 인재 김시환 역시 고마운 동기다. 

 

 그녀를 만나는 길은 그렇게나 어려웠다. 시환의 주선으로 강남역 어느 일식집에서였는데 실은 나는 자못 흥분되고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 약속장소에 들어섰다.  내가 나타나자 길원이는 사뭇 놀라워하면서도 반가움 대신에 불편함을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연결된 덕분에 74학번 휴머니스트 동기들인 관악산 멤버들인 경제학과 출신의 최고의 일꾼 최규일, JTBC 에 근무하면서 맛있는 밥을 사주던 김영신과  전직 교사 채원병과 함께 길원의 집을 방문할 수 있었고 그렇게 이뤄진 74학번 동기들과 만남을 통해 오랜 추억을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고나 할까.  하긴 훨씬 오래 전인 30여년전 당시만 해도 한적하고 깨끗한 바닷가로 잘 알려져 있던 옥계 바닷가에서 잡아올렸던 모시조개를 근처 숙소였던 용평리조트 캠핑장으로 돌아와 조개탕을 끓이던 중, 또 강남성모병원 로비에서도 정말로 우연히 길원이와 조우한 적이 있긴 하다. 

 

  1974년 대학 1학년 때, 한국휴머니스트 학생회에서 만나 그 해 여름 농촌봉사 활동으로 풍도로 떠나 활동했던 팀원들이기도 한 선배님들과 함께 길원이네 집을 방문하였다. 풍도는 최근 몇 년 전부터 야생화 천국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섬이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풍도는 현재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속해 있으며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약 41㎞, 대부도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17㎞ 지점에 있는 섬이다. 섬 주변에 수산자원이 풍부하다 해서 풍도라 부른다는데 당시에는 바람이 많아서 풍(風)도 인 줄로만 알았었으니 ... 섬의 면적 1.84㎢, 해안선 길이가 고작 5.5㎞인 작은 섬 풍도.

 

 인천에서 2시간 정도 배를 타고 여름 농촌봉사활동을 위해 22명 정도 되는 대원들로 구성된 봉사단이 풍도로 향했다. 참으로 순수했던 열아홉 살 그 여름, 풍도초등학교 교실을 숙소로 이용하며 열흘 간의 풍도주민과 학생들을 위해 나름 펼쳐진 농촌봉사활동이었다. 봉사단 단장이던 연대 의대 2학년 권오진 선배님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덜덜 떨었다면 거짓말처럼 들릴까? 정말 그렇게 순진했던 19세 소녀...였던 나..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던 서해의 낙도.. 당시 대원들이 먹을 김치가 다 떨어졌을 때 겨우 2학년이던 중문과 이정분 언니가 양배추를 절여 맛있는 김치를 만들어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어떻게 그런 솜씨를 지녔을까 내심 놀라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해 가을, 휴머니스트학생회 가을 워크숍을 떠나던 날의 일이다. 청량리 역에서 슬슬 움직이는 기차에서 내리다 발을 헛디뎌 뇌를 다쳐 인근 동산병원으로 실려가 수술을 받고 생사의 기로에 있었던??? 한경애 선배..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휴머니스트회 부회장으로 동분서주하던 풍부한 이야깃거리 소유자 영문과 두진숙선배.. 대학 2년 겨울방학때 떠났던 충북 영동군 자계리 마을 농촌봉사활동을 위해 1차 선발대원으로 당시 회장이던 김시환과 함께 영동까지 기꺼이 다녀오는 열의를 보였던 길원이.. 사실 그 겨울 농촌봉사활동은 길원이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나는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우리들의 열의는 잔 가지를 치면서 새로운 눈을 부릅뜨고 서로 다른 데로 벋어나가고 있었던지 모르겠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각자들 만남을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길원이와 함께 만나게 된 것은 40여년이 흐른 후의 첫 만남인 셈이다. 

 11월 중순 화창한 늦가을 어느 날..  이정분, 한경애, 두진숙  선배님들과 함께  용인 두창저수지 부근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길원이를 방문했다. 

 

 주방 옆 저장공간에는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각종 jam 과 토마토 퓨레 등이 가득 담긴 유리병들이 빼곡했다. 500여 평이나 되는 대지에 채마밭도 마련하고 집 담을 둘러 각종 허브와 꽃들로 가득한데 그걸 혼자 가꾼다.  앞치마 두르고 방금 비닐하우스에서 작업을 하다 나온 듯한 차림의 길원이는 제법 농부 티를 내고 있었다.  블루베리, 매실 등 유실수도 있고 배추며 열무, 파 등 그야말로 자급자족하기에는 너무도 풍족해 보이는 채마밭이 부럽기까지 하다. 음식 만드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어서인가 그 많은 채소들을 거의 다 소비하는 것 같다. 물론 남에게 퍼 주는 넉넉한 인심을 알고도 남음이 있지만.. 

 손수 구웠다는 곡물빵은 정말 일품이었다. 구수하고 맛있는 빵과 커피..  대 식구 살림살이에 쉴 틈이 없는 나의 손가락,, 특히 둘째 손가락 마디는 구부리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어서 커피잔을 잡기에도 버거울 정도인데..  길원이가 준비한 커피잔은 손잡이가 넉넉하여 검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한 번에 넣고 잔을 들 수 있어서 너무 편했다. 내심 이런 커피잔을 어디서 구입하는 거지? 하였다.

 

 2층에는 자신이 노르웨이대사관 사무실에서 30여년을 사용하던 책상을 가져와서 그대로 쓰는 거라고 하니 자신의 물건에 어지간히 애정이 묻어있다는 말일 것이다. 

  사방(四方)이 통유리로 나 있는 집이라 거실에서 어느 방향으로 둘러보나 바깥의 풍경이 계절의 속살을 드러내는 자연미와 시원함 그 자체이다. 바로 코 앞이 어느 성(性)씨의 종산이라는데 도토리 나무는 물론 온통 산자락이 울타리로 둘러싸인 셈이라 자연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집이다. 어떻게 그렇게 배산임수가 최고인 땅을 고를 높은 안목을 지녔을까.  그 대신 마당에는 가으 내내 참나무 이파리들이 낙엽져 뒹굴고 온통 가을이 묻어 있었다. 낙엽을 쓸어내기에도 벅차다고 하지만.. 

 

 자동차 주차공간 또한 미국 식 garage 식으로 지어 밖에서는 자동차가 보이지 않으니 미국의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다. 하지만 거실 천정은 전통 서까래를 둘러 전통가옥의 느낌도 주는 다분히 혼합식이면서도 개성있는 주거 공간으로 건축 설계에 주인의 요구 사항을 넣었다고 한다. 다들 부러움 반 칭찬 반으로 길원이의 안목에 놀라움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 공간에 있었던 추억의 장소, 74년 농촌봉사활동으로 떠난 풍도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74년에 만났으니 45년여의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격의가 없어 좋았다.

 

 뒷산에 올라 코로나 걱정 없이 임도를 따라 산책하고 돌아와 수다떠는 시간은 어찌나 빨리 지나가던지..  돌아오는 길에.  즉석 미팅을 제안하는 두진숙 언니.. 이제는 다들 여유로워진 시간 덕분이기도 하지만 마침 집에 아무도 없다며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두진숙 선배의 제안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모두들 두 언니 집으로 가서 2차 수다를 떨었다는 거 아닌가.. 거의 새벽 2시 넘어까지 ..늙어서인지 다들 피곤해져 그냥 소파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니 두진숙 선배가 살고 있는 워커힐 아파트에서 한강을 바라다보는 전망도 기막히게 멋지다. 이 집에 오면서 리모델링을 했다는데 역시나 주방에 낸 창 밖으로 오래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음식을 만드는 시간을 퍽 행복하게 할 것 같다. 주부들의 로망 아니런가. 

셀카의 한계 따스한 햇살 비추이는 담벼락에 기대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회포 풀기

 

 매 월 만나자는 급작스러운 제안이 있었지만 실은 바램일 뿐인 걸 안다..  또 만날 날이 있겠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