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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감사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라일락74 2023. 11. 26. 15:04

20231016일 새벽 아버님 소천하셨다.

새벽 150분경,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다급히 수원 요양병원으로 향하는 남편이 옷을 주섬주섬 입는 모습을 보며 혹시..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야 말았다. 언제가 될지 몰라 늘 긴장하고 있었기는 하지만 막상 아버님의 별세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여름, 할아버지를 면회하던 날 준용이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수학을 좋아하셨어요?”하니, “으응, 수학은 아주 명쾌한 학문이지.”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셨으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지녔던 분이다. 97세된 분이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깔끔하게 표현하셨으니 얼마나 또렷한 의식으로 누워만 계셨던가. 그렇기에 손자녀들은 더욱 죄송할 따름이었다.

다정한 두 분   친지들과 ..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으셨을 정도로 청렴한 공직생활을 하셨다. 그러나 훈장을 받았던 내용보다는 충남 청양, 서울 H고등학교에서의 교편생활이나 수업 종이 땡 치면 복도에 계시다가 곧바로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셨다는 이야기를 손주들에게 늘 무용담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스스로 추억을 꺼내시고 빙그레 웃으시면서..

 

큰딸 정민이가 영어교사 연수로 미국 캘리포니아 치코에 있는 CSU(California State University) 대학에 잠시 다녀오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니, 지체 없이 책꽂이에서 지리부도를 꺼내 지명과 위치를 확인하시며 좋아하셨었다.

모자를 즐겨 쓰셨던 아버님, 어머님

4년 전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시자 혼자 되신 그 쓸쓸함을 내비치지는 않으셨으나 그저 자녀들 가끔 만나는 것으로 따뜻한 미소를 지으셨을 뿐이다. 자녀들 모두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밥 먹이시고 그리고 떳떳하게 음식값을 내시던 분.. 국방부 사무관으로 근무하시다가 퇴직하셨기에 혼자 살아가실 만큼의 연금이 있었던 배경도 있지만 평생을 누구에게나 베풀기만 하셨다아버지 집을 다 날려버린 우리는 그 죄송함에 누구보다 많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와 준용 할아버지 글씨 정선, 할아버지, 할머니, 준용
(준용이 고등학교 졸업식)
증조할아버지와 우진
아버님 원고 모음
 

한 때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신 적도 있었으나 공무원 은퇴 이후로는 오로지 청송심씨 문중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지녔던 분이셨기에, 문중 기록을 책으로 내고 싶어하셨다. 일반적 족보 형태가 아니라 가족들의 대소사를 짧은 이야기 형식을 빌어 소개하는 아버님만의 족보 책인 것 같았다. 

 

내가 갓 결혼했을 당시, 아버님은 내게 ,  한산 이씨(韓山 李氏) 시조인 고려 말 성리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 찬성사 곡(穀)이 청송 심씨(靑松 沈氏) 문중으로 세종대왕의 장인( 丈人 )이자 소헌왕후의 부친이신 심온(沈溫)의 아버지 심덕부(沈德 沈德符 : 고려말 문신이자 조선조 무신)의 학문적 스승이었다며   '너희 문중과 우리문중은 소중한 인연이 있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준용이 첫돌(1989. 2. 14) 아버님 생신(1989. 10) 병상에서 어쩔 수 없이 필담으로..

 

 

아버님에 대한 모습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늘 앉은다리 책상에서 각종 자료를 찾으시며 원고를 작성하시던 장면들이다. 단순히 집안 계보를 기록하는 수준을 넘어 문중의 크고 작은 행적들을 자세하게 다루는 문중역사서를 만들기 위해 90년대 중반부터 이 작업을 시작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먼저 정신문화연구원과 국립중앙도서관을 틈틈이 방문하시어 각종 자료들을 모으셨다. 그렇게 해서 쓰신 원고들을 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워드 작업의 많은 부분을 도와드렸다. 수많은 선조들의 일상과 업적에 대해 글로 남기는 일이 아버님의 지상 최대의 관심이었던 것이다. 이름은물론 벼슬 등의 관직은 전부 한자로 되어 있었기에 1000 페이지도 넘는 책의 원고를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워드작업을 해 드렸다. 이 작업을 도와드리면서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 중추부의 종2품 관직) 등 조선시대의 많은 종류의 벼슬, 처음 들어보는 말단 직함까지 두루 알게 되었다

 

90년대 초반에는 족보 책의 특성상 세로쓰기 작업을 하기 위해 지금의 앱(app.)처럼 세로쓰기 용 CD인 <코렐>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다. 수년 후 컴퓨터 버전이 높아짐에 따라 한자 입력 작업은 엄청나게 쉬워졌다. 며느리에게 미안하다시며 청계천 인쇄소에 맡긴 적도 있었으나 그들 중 "너 만큼 한자를 잘 알고 있는 이가 없다. 또 네가 해 주면 좋겠구나.” 하셨고, 물론 기꺼이 그 일을 도와드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 죄송함을 조금이나마 면책받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내가 아니면 이런 워드작업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아버님은 무척 흐뭇해하셨다.

몇 권의 출간된 족보 책들은 문중사무실에 배부되었고, 아직도 원고를 쓸 게 더 있다며 늘 원고와 책더미로 그득한 방에서 무언가를 쓰시곤 했다.

모자를 즐겨 쓰시던 아버님 10교구 강성용목사님이 주관하신 
위로예배
 

 

어머니는 곱고 옷 태가 나는 세련된 외모를 지닌 분이었지만 망막 굴절이 안 되어 안경 조차 쓸 수 없었던 지독히 나쁜 시력(視力)을 가진 분이었다. 교회에 다니셨지만 눈이 나빠서 찬송가 글씨는 거의 보이지 않는 등 생애 전반에 걸쳐 늘 힘들어 하셨다. 이런 어머니를 위해 아버님은 달력 뒷면에 찬송가 가사를 큼직하게 써 주시곤 했다. 사실 아버님은 교회에 열성적으로 다니신 분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어머니의 신앙생활을 지지해 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더욱 출판 작업을 서두르셨으나 책을 읽는 것외에는 그 흔한 전자렌지 가동조차 하실 줄 모르는 분이어서 모든 것이 힘드셨을 것이다. 연세가 많으셨으니 만날 수 있는 동창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나셨기에 더 쓸쓸하셨을 테지만, 강골이 아니다 보니 차츰 거동이 불편한데다가 겁이 많은 분이라 바로 옆에 의료진이 없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몰려왔던 게 아버님이 스스로 요양병원에 들어가겠다고 하신 이유이다.

 

물론 아버님은 맏이인 우리와 같이 살고 싶으셨던 것 같다. 아주 살짝 그런 속내를 드러내셨으나  딸네와 합가하여 손자를 돌보며 직장생활까지 하며 나름 대가족 살림을 하고 있던 나는 애써 모르는 체 했다. 막내딸네 집 1층에 살고 계셨기에 나도 시누이 덕을 좀 보겠노라 했던 속셈을 부인하지 않겠다. 착한 심성을 지닌 시누이였고, 시누이도 내 상황을 뻔히 아는 터라 그렇게 지내셨다. .

아무튼 병원에 들어가셨던 직후부터 그 외로움은 얼마나 더 깊어졌을까. 하필 코로나가 터져 병원 면회가 금지된 적도 많았는데 그때 아버님은 병원을 택한 결정에 대해 많이 후회하셨을 지도 모른다.

     

 

지난 추석 무렵 2차 폐렴 이후 아버님이 어떻게 되실지 몰라 하던 중 우리 <잠실교회> 10교구 강성용목사님을 모시고 병원 면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10월은 교회에서도 무척 바쁜 일정들이 많아서 좀처럼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고, 또 나 역시 가끔 시간강사로 학교에 출근해야 하는 날도 많았기에 하루하루가 바빴다. 겨우 1018일 일정을 잡고 아버님을 면회하기로 했던 것인데, 바로 뵙기로 한 바로 그날 면회 대신 위로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임을 새삼 말해 무엇하리. 강성용목사님의 깔끔하고도 마음을 찡하게 움직이는 설교 말씀을 들으며 흐르는 눈물을 자꾸 닦아야 했다. , 눈물이 난다. 어머니 때와 달리 문상객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좀 쓸쓸했다. 더러는 당시의 엘리트이셨던 분이며, 어르신의 모습이었다라고 회상하는 친지들과 함께 그렇게 추모의 마음을 가지는 게 다였다.

 

9월말 마지막 면회 때, 정선이 수첩에 아버님은 떨리는 손으로 적으셨다. 많은 돈 액수를.. 그리고 그 돈을 간병인에게 주라는 것이다..따뜻한 분이셨다.

어머니는 또한 얼마나 다정하고 세련된 감각을 지니셨던 분이었던가. 주위 친구들은 가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를 통해 네 시어머님이 얼마나 좋은 분들인지를 알 수 있노라고..

 

이제 두 분은 수원 연화장에 모셔져 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많은 사랑을 받고, 희망과 기대와 환한 웃음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인생의 험난한 여정을 지내오면서 연약해지고 후회 또는 추억을 지닌 채 다시 돌아가는 우리네의 짧은 삶이다. 욕심과 갈등 등으로 메마른 심경에 놓일 때 많지만 결국 육신의 껍데기는 벗어버리게 되겠기에 이제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입성할 수 있을 것에 소망을 두며 살기로 한다.

 

아버님, 어머님!! 다시는 부를 수 없는 분들... 이 순간 다시금 눈물이 맺힙니다. 그동안 참으로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