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결처럼
후텁지근한 7월 하순, 8명 대가족 2박3일 여행을 계획했었다. 하지만 장맛비에다 홍수로 인해 도로가 파손되고 인명피해로 연일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오니 휴양림 측에서 예약 취소를 권해왔을 정도라 여행은 취소되었다. 결국 세종시에 살고 있는 준용이네서의 방구석 여행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로 했다. 궂은 날씨로 인해 갈 곳 마땅치 않았기에 대통령기록관 관람으로 방향을 틀었다.
세종호수공원과 정부 청사와 국무조정실 등지와 가까운 데 있는 대통령기록관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건국 이후로부터 영욕의 역사로 점철된 현대사를 둘러볼 수 있는 역사공간이다. 토요일이었지만 관람객은 많지 않아 한산했다.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채 찾기도 전 6.25남침으로 인한 민족상잔과 계속되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용케도 지켜낸 우리나라의 현대사의 큰 줄기를 담은 기록물들 속에서 역사의 진실을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인지.
조금 딱딱한 분위기일 것 같던 예상과 달리 10여분 채 어슬렁대기도 전에 여기에 오기를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오후에 방문해도 좋을 장소로 어린이체험관도 예약해 놓는 센스를 발휘한 며느리 민지 덕분이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월요일과 법정공휴일에는 휴관이다. 입구에는 대통령 의전 차량인 검은색 리무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우진 우성 두 꼬맹이들도 나도, 와!! 멋지다!를 연발했다.
1층에서 시작하여 4, 3, 2층과 B2층 순으로 관람하게 되어 있으며, 각층마다 <대통령의 상징>, <대통령의 역할>, <대통령의 공간>, <대통령의 선물>, 지하1층에 <어린이체험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개성 있는 역대 대통령들의 휘호, 세계 각국으로부터 받은, 자국의 권위와 상징을 드러낸 진귀한 물품들이 위엄과 화려함으로 시선을 끈다.
4층 상설전시관에 들어서면, 1919년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한 <태극기 목판>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지금의 태극기와는 달리 옆으로 뉘어져 있는 태극문양이 새겨진 목판으로서 태극기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다. 나라를 잃은 설움과 눈물로 숨죽인 채 민족적 거사를 위한 태극기를 한 장이라도 더 찍어내기 위해 애썼을 선열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 후손들은 더 없는 죄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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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당시 태극기 제작용 목판 |
어느새 60대 후반에 와 있고 보니 기록관에서 만난 초대 대통령을 비롯한 12명의 전직 대통령들과 함께 나 또한 역사의 물결의 흐름 어디에선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 흘러왔다.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엄청난 시대적 사건들을 라디오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듣고 본 장면들이 떠오른다.
어릴 때 살던 서울 돈암동에서도 새벽녘이면 저 멀리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의 기적소리마저도 들리던 아득한 시절인 60년대 즈음의 초기기억도 그중의 일부이다. 아스라한 웅성거림들이거나 담벼락에 붙어있던 대통령후보자들의 사진을 담은 벽보들, 골목길 돌아 나오면 동네 한가운데 있던 공회당이 투표소가 되어 사람들로 북적대던 모습 등이 아련하다. 수십여년 동안 소신껏 투표권을 행사하면서, 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될까를 염려한 이가 어찌 나뿐이겠는가만, 역사가 품고 있는 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부디 단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 흘러가는 구름처럼 역사 또한 지나가지만 다시 오고야 마는 역사의 새 물결에 그 진실 담겨 흘러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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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 박정희대통령 휘호 | 60년대 선거 관련 뉴스를 듣는 노인들 |
12명의 대통령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방, 100여년 전의 미국유학에 올랐던 이승만 대통령 등 교육을 통해 이 땅의 선구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첨단 영상 코너에서는 대통령 ID 카드를 꽂아 해당되는 대통령들에 대한 활동사진 및 기록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대형화면을 통해 취임식 등 흑백 영상물로 역사적 장면과 목소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경제개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애썼던 분들에게서 뿜어나오는 위엄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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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RFID 카드 (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
박정희대통령 취임 | 파리강화회의 임시정부 대표단 이승만 左下 |
<대통령선물관>에는 국가 간 정상외교를 통해 주고받은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이것들을 통해서도 해당국의 자원들이나 그 나라 국민들이 아끼는 대상들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광물이 풍부한 중남미 지역 국가들은 아름다운 보석들로 만들어진 팔찌나 목걸이를, 유럽의 뛰어난 예술작품들,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섬세한 수공예품들에서 그들의 전통문화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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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물들> |
어린이체험관 입구에는 역사 여행을 떠나보라는 듯 실물 크기의 <대한민국 비행기>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미래의 대통령이 되어보는 <나의 취임 우표> 체험이나, 대통령 집무실 의자에 앉아 보는 등 꼬맹이들도 신난 모습이었다.
대통령취임 기념우표들 중에는 낯익은 것들도 많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우편 활동이 왕성했던 60~80년대는 우표수집에 대한 관심들이 상당했다. 나도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우표를 무척 열심히 수집했었다. 중요한 통신수단이기도 했던 편지는 우표를 붙여야만 했고, 예쁜 도안물 혹은 series로 발행된 우표들이거나 기념우표들이 대부분이었다. 우체국 스탬프가 찍힌 우표들을 살짝 떼어내 물에 담궈 풀기를 없앤 다음 책갈피에 넣어두면 마치 압화처럼 정갈한 우표로 재탄생되었고, 이를 담뱃갑 셀로판지로 일일이 포장하였다. 이렇게 해 모아 둔 우표책들이 여러 권 있었다. 그런데 88년 3월, 출산 후 몸조리를 하기 위해 시댁에 가 있던 그때, 우리가 살던 집 창문을 뜯고 들어온 도둑들이 여유자적 술까지 마시며 마음껏 물건들을 훔쳐간 것이다. 정성껏 모아두었던 우표책들마저도 다 훔쳐가버린 못된 놈들 때문에 펑펑 울었던 아픈 기억이 있다. 대통령 취임, 외국 대통령 내한 기념우표 등 다양한 종류의 것들도 많았었는데 생각하면 너무도 열통 터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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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의자에 앉아보는 우진, 우성 | 흘러가는 구름처럼 | 흐르는 물결처럼 |
휴양림 여행은 불발되었으나 비 오는 날의 대통령기록관 방문은 그런대로 유익했다. 민중들은 착하지만 때로는 어리석어 풍문으로 들은 지식을 품고 구름처럼 흘러다니는 것 같다. 공과를 따지기 보다는 국민들을 잘살게 하기 위해 개인의 안녕을 뒤로 했던 분들을 마음속 깊이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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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취임 기념우표 체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