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어버이날에

라일락74 2012. 5. 9. 13:40

   May  9, 2012

 

  어버이날과 관련된 나의 첫 기억은 중학교 1학년이던 해인 68년 5월 8일의 어머니날이다. 그 당시는 '어버이 날'이라 하지 않고 '어머니 날'로 제정되어 있었다. 기억력이 제법 괜찮다는 말을 듣는 편인 나도 어찌 된 일인지 초등학교 때의 기억은 상당 부분 생각나지 않는데 초등학교 6 학년을 얼마 넘기지 않았던 중학교 1 학년 때부터의 기억은 비교적 많이 저장되어 있는 것 같다. 아무튼 당시엔 어머니 날을 앞두고 家政 시간에 카네이션을 학생들이 직접 만들도록 했다. 

 

  날씨는 화창하고 비교적  한가로웠던 분위기가 아직도 전해지는 듯 눈에 선하다. 하교 후 집에 들어서니 평소와 달리 엄마가 계시지 않았다. 가정 수업 시간에 만든 빨간 카네이션을 가지고 귀가했는데 엄마가 안 계시니 그 날 따라 마음이 텅 빈 듯 했는데, 알고 보니 바로 그 날 가까이 살고 계시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는 외갓집에 가신 것이다.

 

1971년 1월   나의 중학교 졸업식때
오른쪽 : 아버지, 왼쪽 : 작은아버지
      
1971년 1월   나의 중학교 졸업식때
             우리 엄마
아버지 엄마, 인숙, 창복, 재복

  어린 마음에 오늘은 어머니 날이라 엄마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려야 하는데 하필 어머니 날에 엄마는 엄마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플 텐데 하는 생각과 엄마한테 꽃도 달아드리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나는 하나도 슬프다는 느낌이 없었다. 당시 엄마의 나이가 서른 여덟 정도였을 텐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장녀인 엄마에게도 아버지를 일찍 잃은 셈인데.....  내 나이 서른 초반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나는 우리 엄마보다 훨씬 더 일찍 아버지와 영영 이별을 한 셈인데... 꼭 10 년 전 그 엄마마저도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지난 주일 어버이 주간을 맞아 성가대에서도 절기에 어울리는 곡을 연습하였다. 前奏가 흘러 나오고 미처 노랫말을 입에 붙이기도 전에 벌써 콧등이 시리더니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 그리운 나의 어머니, 아버지.

1968년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날
우리 엄마
1950년대말?? 
오른쪽 : 엄마, 왼쪽 : 작은엄마
긴머리 엄마, 고등학생이던 큰외삼촌

  어쩜 우리 부모님은 그리도 빨리 세상을 뜨셨는지...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는 4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나셨다니..

  건강하시던 분으로 알고 있었건만 어느날부터인가 어두운 얼굴로 자주 누워계시다더니 폐암 진단을 받으셨던 아버지. 의사로부터 한 1년 남짓 살아계실 수 있을 거라고 말을 들었건만 그 말을 들은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命을 달리 하신 아버지는 겨우 만 쉰 일곱 해 만큼만 세상 구경을 하시고 가셨다. 어릴 때는 몰랐었지만 농지를 빌려 채소를 키우고 내다 도매로 내다파는 일을 하시다가 미군 부대에 취업하시고 그리도 좋아하시더니 한 3년 근무하시다가 그렇게 가셨다.

 

그러니 50 대 초반에 혼자 된 엄마는 또 어떤가. '늘 몸뚱아리가 아프다'며 걷기도 힘들어 하시던 엄마.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던 때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로 힘겹게 투병하시다가 당신이 태어난 날짜에 흙으로 돌아가시는 고된 삶을 마감하셨다. 좋은 모습 많이 보여 드리지 못한 채 늘 이렇게 가슴 미어지고 송구하라고... 그렇듯 빨리도 우리 곁을 떠나가신 엄마, 아버지... 께 저는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지 못합니다.

2015년 경  아버님, 준용이 어머니 그리고 나
1996?? 아버님 회갑연 때 ??
1989. 2  어머니, 아버님
준용이 첫돌네(지희, 정선, 정민, 준용)

  눈물이 앞을 가리지 않았던 또 다른 배경의 하나는 바로 시어머님...

  그동안 베풀어 주신 시어르신들의 사랑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나더이다.  그 잘난 용돈 쬐금 드리고 그저 최소한의 도리만 한 양 있기에는 너무 깊고 넓은 가슴을 가진 분들이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오늘은 좀 뻘쭘하지만 어머니.. 사랑해요.. 하고 말씀드릴까... 고맙다고 말씀드릴까.... 망설이다 전화기 앞에 앉아 번호를 찍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얼굴이 안 보이니 용기를 내서 말씀드렸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라고... 그 한 마디 하는데 또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 그리고 목이 메어 결국엔 내 목멘 목소리를 어머니께 들키고야 말았다..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 감사하냐고 하시는데 사실 어머니께서도 조금은 목이 메이신 눈치다.... 

  우리 아이들이 정말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셔서 고맙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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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고아들을 26년간 보살펴 오던 자비스 부인이 사망했을 때 그녀의 딸 Anna Jarvis가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흰 카네이션을 영정에 바쳤는데, 이 사실이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1908년 시애틀에서 ‘Mother's Day'를
제정하게 되었는데 이후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토마스 우드윌슨이 1914년 5월 둘째 일요일을 국가 기념일로 정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살아계신 어머니에게는
빨간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람은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를 표했다.
어버이날의 빨간 카네이션은 ‘건강을 비는 사랑’, 흰 카네이션은 ‘죽은 어버이를 슬퍼한다’라는 꽃말이 있다고 한다.

 

  이제는 나도 어버이???

어버이날이라고.. 두 딸들과 아들이 각각 나름의 메시지를 보내 왔다. 올해는 세 아이들이 다 뿔뿔히 살고 있다 보니 함께 비벼대며 지냈을 때가 그립다.

동미니는 용돈과 문자 메시지로, 토니는 피아노를 치며 '어버이 은혜'를 부르는 동영상을, 주뇽은 멋진 청년이 되겠노라는 다짐으로 각각 사랑의 표현을 보내 왔다.

 얘들아... 고맙다..

 

  어느 새 나도 흰 머리 솟아나는 나이에 와 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고, 또 하고 싶고 가고 싶은 데도 많은 데 기대 보다는 포기가 더 빠른 길에 서 있는 거 같아서 드문드문 서글픈데...

 

그래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사랑한다고 안부를 묻고... 고마워하고.... 또 아이들의 미래를 기대하고.. 그래서 살아가는 것 같다.5 월은 산들 바람에 더욱 푸르고... 나뭇잎새는 바람결에 더욱 얼굴을 비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