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문화 탐방 - 휴머니스트회 고향 방문 여행/공주, 부여
2014. 5. 24(토)
1년에 한 번 있는 휴머니스트회 고향 방문 여행으로 떠난 1박 2일 공주, 부여 여행.
이번에는 부여, 공주를 돌아보면서 백제 유적지와 문화를 더듬어 보는 시간이었다. 양재역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34명의 휴머니스트 회우들이 公州를 향해 먼저 떠나고, 최용철, 권오진 의사쌤들은 따로 저녁 식사 장소에 나타나기로 하였다.
천안~논산 고속도로, 부여 ~ 평택 고속도로가 뚫려 서울에서 두 시간 정도면 공주, 부여에 도착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나의 아버지의 고향은 부여에서 가까운 서천군 한산면으로 어쩌다 한 번 다녀오려 해도 시간이 많이 걸려 엄두도 못 내던 곳이었는데 이토록 수월해졌다니 격세지감...
할머니, 아버지와 엄마 두 분 다 한산면에 자리한 先山에 누워 계시건만 이제 훨씬 빠르게 다녀올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이 되었어도 쉽지 않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지 12년, 아버지는 너무도 오래 전인 1986년이니 거의 30여년이 지난 세월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 나이에도 아직 친정 부모님이 살아계신 경우도 많건만 우리 부모님은 너무도 일찍 우리들 곁을 떠나셨다. 부여, 공주 여행길에 들어서면서 부모님 산소에 찾아간지도 몇 년인지 모를 만큼 세월이 지났음을 생각하니 여행이 기대되면서도 마음은 서글펐다.
일정 : 24일 마곡사 - 중식 - 부여로 이동 - 부소산성 (고란사, 낙화암) - 궁남지 - 정림사지 - 부여롯데리조트
25일 : 조식(리조트 內) - 백제문화단지 - 공주로 이동 - 공산성 - 무령왕릉 - 공주박물관 - 서울
공주(公州) 마곡사
마곡사는 왠지 작은 사찰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규모가 크고 숲에 포근하게 들어앉아 있으며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다웠다. 주위에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마곡사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산나물이나 약초를 파는 상인들이 더러 있을 뿐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한적하였다. 온통 녹음이 우거진 녹색 정원 속으로 들어갔다.
마곡사에는 특별한 계단이 있었다. 얼핏 듣기로는 이 절에만 있다는데.... .. 길게 생긴 통나무를 세워 놓고 발을 디딜 수 있을 만큼 파 내서 윗층 으로 비스듬하게 연결해 놓았다. 몇 명이 시도해 보더니 올라가는 게 영 불편하다 하였다. 그럴 밖에
이름도 특이한 '가릉빈가'라는 곳에서 엄청나게 맛있는 산채 비빔밥을 먹었다. 모두들 심상치 않은 음식점 이름에 대해 검색도 해 보고 나름 알고자 하는 욕구를 또 드러내고들 있다. 정태호 회장님 부부가 답사를 거쳐 정한 곳이다.
부소산성
지방 문화 해설사가 백제 건국부터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그 동안 수 백 번도 더 했을 해설에 gesture를 가미하면서 충청도 식 말투로 열성을 다 해 해설한다. 휴머니스트 회원들은 누구보다 학구적인 분들이라 다소 이야기가 길어짐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해설을 듣고 또 질문을 하는 등 적극적이다.
마을 아랫녘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으며 예쁘게 피어난 들풀들을 기웃거리며 걷는다. 각자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누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소리 내며 흩어지니 마치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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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宮南池) 한국휴머니스트회 곽수일 교수님 촬영 |
백제 문화 탐방 중인 휴머니스트 회우들 |
부소산성 guide 의 설명에 귀 기울이는 Hu 회우들 |
낙화암, 고란사
- 백제가 멸망하게 되자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한 많은 궁녀들을 일컫는, 즉 삼천궁녀 들이 낙화암 절벽에서 백마강에 몸을 던져 나라의 비극을 받아들일 수 없었음을 과대포장한 내용에 대해 해설사는 열변을 토한다. 백제 의자왕에 대한 참으로 터무니없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힘들다고..
의자왕이 갖고 있는 긍정적 이미지도 많은데 敗亡國이 갖는 부정적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하게 과대포장해서 전해 내려오고 있고, 또 그것을 별다른 해설 없이 역사 교과서에마저 삼천궁녀로만 기록되어 있는 것도 그러고 보니 얼토당토 하지 않은 이야기인 것 같다. 그렇게 역사는 왜곡되고 그렇게 굳어져왔음을 성토하고 있다.
- 고란사 약수와 백마강 유람선 승선
백제 땅이 주는 이미지는 약하고 사라진 왕국이며 찬란했던 문화를 왕인, 아직기 등 일부 학자가 일본에 전수한 정도.. 이렇게만 알고 있는 대부분의 역사적 배경 지식 때문에 알게 모르게 백마강도 샛강 정도일 거라는 상상을 했었다. 그러나 아, 막상 백마강을 바라보니 출렁이는 거센 물결과 멋진 풍광이 예상을 뒤엎고 펼쳐졌다.
'백마강 달~바아암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그리웁구나.. '
이 옛 노래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술이 거나해지면 언제나 즐겨 부르셨던 곡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버지에게 있어 백마강은 좀 남달랐을 지도 모르겠다.
궁남지
-주민들이 생계 수단으로 가꾸기 시작했다는 연꽃 단지가 꽤 넓게 조성되어 있었다. 수련을 시작으로 큰 연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아직은 일러 넓은 연잎만이 연못위로 깔려 있다. 평화로워 보이긴 하지만 그늘이 별로 없는 게 흠이랄까.
정림사지 5층 석탑
- 우리나라에 있는 塔들을 구경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다보탑과 석가탑은 얼마나 유명한가. 신라의 향기가 녹아 있는 아름다운 탑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백제가 남긴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다보탑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로 너무도 아름다운 곡선을 뽐내고 있다. 현존 석탑 중 가장 오랜 것으로 천 오백년이 지난 세월에도 흩어짐 없이 세월의 흔적만을 간직한 채 우아한 자태로 남아 있다.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나당 연합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했을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마치 자신이 백제를 정벌한 양 하는 뜻의 글귀를 남겨 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단다. 목조 건물의 배흘림 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 기법의 기둥 표현이라 더욱 더 돌의 단단함이 부드러움을 연출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옛날에 우리네 조상들은 어쩌면 그리도 솜씨가 좋은지 참으로 우아한 모습이다. 특히나 백제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는 놀라웠다고 한다. 신라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조각한 석공의 이름이 아사달. 그가 바로 백제인이라고 한다. 돌 다루는 솜씨가 또한 돋보이는 곳이 바로 고분이다. 무령왕릉에서부터 송산리 고분이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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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낙화암 절벽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 유람선 |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
수 천 년 세월을 견디면서 귀퉁이들이 닳아졌지만 백제인들의 소박한 솜씨를 볼 수 있는 불상 |
2014년 5월 25일
백제문화단지
남아 있는 백제 유적지가 별로 없음이 몹시 아쉽지만 그나마 옛 성터, 사찰 터에서 발굴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조성한 백제 궁궐과 탑을 세워본 곳. 몇 년 전에 조성한 옛 모양 건물이니 옛 것도 아니요, 새 것도 아닌 듯하니 아쉽다.
무령왕릉, 공주박물관
고2 역사 시간이었지. 그 당시 역사 선생님(장익태 선생님)이 '무령왕릉' 발굴이라는 엄청난 역사학계의 희소식이 있다며 열변을 토하셨다. 뭔지 몰라도 대단한 건가 보다 했던 여름날의 수업 시간이 떠오른다. 나는 역사 과목에 무척 관심이 높아서 세계사, 국사 시간에는 정말 총명한 양 했던 것 같다. ㅋ
그 이후 '나의 문화유산을 답사'를 읽으면서 무령왕릉 발굴에 얽힌 내용과 맞물려 생각해 본 적이 많았다. 한 2 년동안 송파구청 문화재과에서 주관한 '백제 문화 탐방' 프로그램에서 몽촌토성과 방이동 백제 고분 관련 해설을 여름 방학 동안 맡은 적이 있잖은가? 참 나의 썩 다양한 이력.. ㅎ 하지만 쥐꼬리만한 공부라도 했던 덕에 무령왕릉이 유일한 전축분이라는 사실과 이러한 벽돌무덤은 중국 양식이라는 사실을 들었던 터라 무령왕릉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고 그 이후 꼭 들러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그 역사적 현장에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와서 보니 무령왕릉 뿐 아니라 바로 옆 송산리 6호분도 전축(塼築)분 (벽돌 무덤)임을 알 수 있었다. 백제 25대 무령왕(501-523 재위)과 왕비의 합장릉으로, 1971년 5호분과 6호분에 물이 새서 배수로 작업을 하던 인부가 직감적으로 보물임을 알고 바로 문화재청에 신고하여 발굴된 곳이다. 세계 유일하게 자신이 죽어서 묻히게 될 무덤을 돈 얼마를 주고 샀는지, 또한 그렇게 하는 자신은 누구인지를 알게 해 놓은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 무덤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이랴!!!
이 무령왕릉 1 基에서 무려 1700 점 이상의 유물이 나왔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고 고마운 일인 것 같다. 나머지 송산리 고분들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기에 그 어떤 단서도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비하면 몇 미터 바로 옆에 조성된 무령왕릉이야말로 우리나라의 귀한 역사적 가치 그 자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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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무령왕릉 입구를 지키는 石獸-鎭墓獸 (국보 162 호) | 1972년 발굴된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 일부 | 내용을 입력하세요 |
내일이면 헤어질 것을 아쉬워하는 회우들
늦은 밤까지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다소 술에 취한 듯... 다소 진심을 털어놓는 듯.... 다소 흐트러진 듯...
40년 전에 처음 만났던 이들이 대부분으로 서로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정겨운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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