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뜰에 골치거리가 산다」/황선미 著/사계절 刊
2016. 7월
(무덥기가 그지 없던 이번 여름... 누구나 그랬겠지만 정말이지... 너무 더워서 날씨 때문에 못 살겠다 싶을 만큼 힘들었던 하루하루였다. 무얼 하며 지내야 할까를 생각할 수도 없이 그저 망망한 즈음 읽게 된 책....독후감으로 정리해 본다.)
돋보기를 쓰기 시작한 지 벌써 14 년째. 욕심껏 책을 뒤적일라 치면 이내 눈이 피로해지니 독서삼매에 빠지기란 참 어림도 없다. 어쨋거나 무더운 여름 한 날 추천도서를 뒤적거리다가 여러 공공기관 추천도서인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를 읽게 되었다. 책 제목을 대하면서 설마, 골칫거리란 다름 아닌 내가 아닐까? 궁금해 하며 著者 서문을 읽노라니 비엔나에서 몇 달을 보내며 쓴 글이라는 말에 내심 부러움으로 첫 장을 펼친다.
버찌 마을, 한 때 벚나무들이 무성했음을 짐작케 하지만 지금은 개발로 인해 근방에는 아파트로 들어차 있지만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는 지 마을버스가 쉬어 돌아나가는 종점 구실을 하는 이 언덕배기 동네는 여전히 허름하다. 개구쟁이들이 냅다 걷어찬 축구공이 튕겨나가면서 가게 주인 장 영감의 잔소리가 한적함을 깨뜨릴 즈음 도회적인 모습의 강 노인이 이 광경 속으로 들어온다. 지워내려 하지만 자꾸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유년의 기억과 함께 아직 미해결 과제가 남아 있는 답답한 심정으로 과거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강 노인은 야산의 봄 풍경 속에 들어앉은 오랜 건물과 드넓은 땅이 이제는 자신의 소유지라는 사실에 우쭐해진 것과는 달리 꽃과 나무들은 여전함을 본다. 오래 전 남의 집 하인 처지였던 아버지처럼 자신 또한 지레 수그리고 살아야 했던 삶에 대한 보상이랄까, 보란 듯 당당해지고 싶은 꼬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는 맛있는 것을 '마음껏 해 먹을 것과 악기 배우기'라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트럼펫이나 첼로를 하고 싶지만 늙은이에게 다소 수월할 것 같은 기타를 배우기로 한다. 기실 트럼펫은 외롭던 어린 시절 그가 동경했던 삶의 한 부분으로 아름다운 나팔 소리로 다가왔던 악기이며, 첼로는 자신이 다가갈 수 없는 여자 애가 연주했던 악기로 늘 언젠가는 자신도 이 악기들을 연주해 보리라 했었으나 그는 이제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노인이 되어 있다.
수탉이 홰 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야 할 정도로 한적한 뒤뜰. 새벽 이슬이 놀다 가는 이 숲에 강 노인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철책으로 막아놓아 독불장군으로 지내려 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강 노인의 아버지는 주인집 딸이던 송이의 그네를 나무에 매달아 주다가 사고로 죽었고, 5년을 겨우 죽어 지내다가 마을을 떠난 이후 특유의 강인함으로 사업에 성공하여 마을사람들 모두를 향한 복수심을 키워왔던 터다. 그리하여 아무도 모르게 망해 가는 주인집을 자신이 사 두고 옛일을 잊지 않겠다는 듯 창고마저도 손 끝 하나 건드리지 않게 하고 누구의 출입도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출입 금지-주인 백’의 경고를 무시하고 동네 꼬맹이들인 유리와 상훈이, 피엘은 물론 유리의 할머니마저도 마치 오래전부터 익숙해 있던 모습으로 여기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심지어 텃밭을 가꾸고 닭을 치는 중이다. 아이들은 이곳이 누구의 땅인지에 대한 관심이 없음은 물론 오히려 뜬금없이 나타난 강노인에게 여기는 ‘크리스티안 강, 주인백’의 숲이라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자신들의 놀이를 방해하고 있다며 강노인을 당황하게 만든다. 어릴 적 주인집 여자 애한테 자존심을 상해 본 기억 외에는 누구에게도 굽신댈 필요 없이 보란 듯 살아온 그가 남의 땅에서 오히려 당돌한 이 아이들한테 기를 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혼자 놀면 무슨 재미야? 라는 꼬마의 한 마디에 심장이 찔려버린 듯 가슴이 아팠던 강 노인은 서서히 ‘혼자’에서 ‘여럿’ 속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는 것 같다.
울타리를 쳤으나 어느 틈엔가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게 된 작은 숲으로 돌아온 강 노인은 근처 문화센터를 다니면서 자칭 동네 터줏대감이라는 장 영감으로부터 차츰 동네 사람들의 수십 년 전 부터 지금까지의 삶의 굴곡들을 알게 된다. 불의의 사고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이 마치 주인집과 연결된 것으로 오해했던 강 노인이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찾아왔으나 불행했던 사건들을 차츰 수용의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원래 그 상태로 이 집이 유지될 것을 바랐던 순간 평생 오해의 광주리 속으로 밀어 넣었던 자신의 기억과 오해의 대상이었던 마을의 모든 이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제 집 드나들 듯이 쥐구멍으로 남의 땅을 오가는 꼬맹이들을 막겠다는 심통이 불쑥불쑥 드는 것은 비뚤어진 자신의 모습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어느 날, 피부색이 까만 혼혈아인 피엘의 아버지로부터 발이 아파 제대로 걷지 못하던 자신에게 선뜻 신발을 내 주던 도움을 받으면서부터 외로움으로 몸서리치는 사람이 자신 뿐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피엘은 오래 전 자신을 괴롭혔던 경수의 외손자라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지만. 숲으로 들어와 마음껏 놀던 아이들, 새벽마다 시끄럽던 수탉들의 울음 소리들이 점차 익숙해질 무렵, 강노인은 그제야 이제는 풍요롭게 살게 되었건만 정작 자신의 머릿속에 종양이 생기게 되자 스스로에게 따뜻한 밥과 음악을 먹여주고 싶었음을 깨닫는다.
아이들의 순수하고도 당당한 태도에 이미 무장 해제 당한 강 노인은 어느새 울타리를 열어놓았다. 그리고 가끔 암탉이 낳은 달걀들이나 텃밭의 푸성귀들을 거둬가는 백발의 ‘헛소리 할망구’가 그의 눈에 들어온다. 조용한 말씨와 고운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이 할망구는 낯선 강노인에게 오히려 누군에 여기에 왔느냐며 한 마디 하지만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강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손주들은커녕 결혼도 해본 적 없는 강노인에게는 동네 꼬마들이며 장영감이며 또 부동산집의 바보처럼 보이는 남자와 그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련된 부인이며, 이들의 거침없는 행동들 모두가 불편하기 그지 없으면서도 어느덧 그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어느 날 왠지 티꺼우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이던 낯선 강노인이 바로 그 동네에 살던 강대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겟방 장 영감이 찾아온다. 두 노인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되고, 결국 동네 터줏대감 격인 장 영감으로부터 동네 꼬마들이 옛친구들의 손주들이며,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들이 사실은 불행했던 환경에 처했었다는 걸 알고는 동질감과 연민을 품게 된다. 좋아했던 분홍 치마 차림의 주인집 딸 송이의 도도함과 주눅 들지 않으려고 날을 세웠던 강대수. 그는 실상 지금의 꼬마들에게 점차로 향하는 관심이 도대체 못마땅하지만 이미 자신의 마음이 열린 게 다행이면서도 못마땅한 이중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갈등에 쌓여 있다.
거실에 놓인 피아노를 마치 자기 집 것인 양 제멋대로 두들기던 꼬마 유리. 유리 엄마는 도무지 대체 그 동네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게 유학까지 다녀온 피아니스트라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텃밭을 수시로 드나들던 헛소리 할망구가 바로 자신의 시어머니이며 지금은 치매 환자라는 사실과 함께, 시어머니가 예전부터 갖고 있던 거라며 새 주인이 되어 나타난 강 노인에게 열쇠를 내주며 시어머니가 강대수 아버지의 죽음이 그네를 매달라고 부탁했던 자신 때문이라며 평생을 괴로워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그제야 백발의 헛소리 할망구가 그 옛날 주인집 딸 송이라는 사실에 아연실색해 지는 강대수 하라방.
유리 엄마가 주고 간 열쇠로 벽장을 열어 보게 된 그는 수취인 거절로 인해 수십 년 간 보관되어 있던 두 장의 편지를 발견한다. 강대수를 생일 잔치에 뒤뜰에 초대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너무 잘난 척해서 미안하다며 평생 뉘우치며 살아갈 거라는 송이의 첫 번째 편지와, 다른 하나는 대학 졸업을 앞둔 송이의 피아노 연주회 내용이 담긴 편지와 소년 강대수가 아버지가 함께 찍은 흑백 사진이 들어있었다. 강 노인은 충격에 빠지고 자신이 지녀왔던 생각들이야말로 종양 덩어리였음을 깨닫고는 쓰라린 눈물을 흘린다. 소년의 가슴에 심겨진 서운함과 오해에서 지나간 세월들을 용서로 받아들이게 되는 강 노인.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강 노인은 뒤뜰에서 노는 장난꾸러기들이 마치 자신의 손주들이며 아무 기억도 못하는 헛소리 할망구 송이를 마음에 품었던 소년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뒤뜰에 산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야말로 바로 우리네 인생들의 모습이 아닐까. 나 역시 숱하게 옹졸함을 간직해 왔으며 그 중 더러는 내 잘못이 많았음을 종종 깨닫지 않았던가. 뒤뜰, 작은 숲, 언덕, 텃밭, 울타리 같은 말들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따뜻해졌다. 골칫거리들은 다름 아닌 우리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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