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9. Wed.
휴머니스트회 염돈재 선배님의 초대로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 점 하늘 김환기 a dot a sky> 전시회를 다녀왔다. 김환기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및 개인소장품들을 총망라해 대여받은 김환기 화가의 대작들을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로 호암미술관의 야심작이라고 한다. 요즘 너무도 우울해 있는 딸 정선이와 미국에서 34년이 거주했던 여고 동창 최충희도 이 멋진 만남에 동참하였다.
오랜 기간 국정원에 근무하셨던 염돈재 선배님은 현재 각종 커뮤니티, 신문 등에 국내정세 등을 다룬 기고문을 내시거나 유투브 <펜 앤 마이크>에 출연하시는 분으로서 미술 분야에서도 대해 전문가적인 관심과 안목을 가진 분이라는 걸 알게 되니 놀랍고 부러웠다. 10여년 간의 외국 근무 당시 미술관을 많이 다닌 덕분이라며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에술적 소양이 깊지 않고서야 될 일인가. 선배님은 특별히, 세계 명화 속에 나오는 누드 화를 소재로 한 우표 수집 마니아로서 무려 1,400여장이나 소장하고 계시다고 하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어쨌든 용인 쪽에 왔으니 이왕이면 가까운 기흥에 있는 <백남준미술관>도 들러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그곳에 도착, 오후 2시에 진행되는 도슨트의 해설을 들었다. 한 6년 전 쯤 용인시 수지구에 살 때 한 번 가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새로 단장한 후로 처음 가게 되었는데 마치 처음 방문한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낡은 TV들로 만든 로보트 정도 같은 작품에서는 모니터들마다 각기 다른 영상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데 그 속에 생동감이 흘렀다. 남들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들에 대한 천재들의 발상은 세대를 뛰어 넘는다는 사실은 모르는 바 아니건만 여전히 천재 백남준의 작품세계는 수십 년을 내다 보았다는 점에서도 난해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잊혀질만하면 천재들은 태어나고 또 태어나는 것 같다.
80세도 넘은 염돈재 선배님은 다리가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손수 운전으로 다음 코스인 호암미술관으로 안내해 주셨다.
에버랜드 근처에 있는 호암미술관은 호수와 숲으로 둘러싸여 호젓하고 풍광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이곳에 다녀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상에서의 탈출이라 하겠다.
![]() |
![]() |
![]() |
김환기의 <우주> 앞에서 . |
딸 심정선 | 품위 가득한 여고 동창 충희 |
김환기 그림을 좀더 잘 감상하기 위해 먼저 사전 지식이 필요한 만큼 검색도 해 보라는 선배님의 권고로 송파도서관에 가서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 발행본인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충렬 지음 >, <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이경성 지음>를 빌려 읽게 되었다. 화가 김환기에 대해서는 그가 點畵로 유명한 분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으나 이 책들을 읽으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예술혼에 담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열정이 어떠했는지를 접하면서 나의 문화 노트 목차에 올려놓아 본다. <2002년 문화 인물> 로 선정되었던 사실은 미처 알지도 못했지만 이미 21년 전에 지금보다 훨씬 더 조명을 받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김환기는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의 만석꾼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수화(樹話). 나무와 많은 대화를 한다고 할까? 화가 자신이 찾아낸 한자로 지은 것이라 한다. 1936년 니혼대학 미술과를 졸업하였다. 어머니는 휘황찬란한 이불만한 깃발들이 하늘에서 마당으로 내려오는 태몽을 꾸고 김환기를 낳았다고 한다. 화려한 깃발들이 마당을 내려오는 꿈이라니, 김환기가 화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뛰어난 감성을 지닌 그는 글 수준도 남달라 당시의 문학가들과의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그의 작품 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죽을 때까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뉴욕에서 화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할 무렵 시인 김광섭의 <저녁에> 1969년, 라는 시를 받아들고 시의 마지막 연에 쓰인 그대로 제목을 붙인 그림이다. 그는 결국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뉴욕에서 겨우 62세의 나이에 생을 마치게 되었지만 늘 언제 고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보고싶고 그리운 이들이 많았다. 맨하탄 의 눈 내리는 겨울날 흩날리는 눈발을 연상하며 점화를 그리게 된다. 점 하나에 보고싶은 이들을 담고 담아낸 작품이 바로 세상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따뜻하기 그지없는 추상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인 것이다. 이후로 그는 점화에 몰두하게 된다.
수화 김환기는 점으로 우주를 표현하였는데, 산만할 것만 같은 청회색 점교에 의한 점들의 패턴은 오히려 눈에 위안을 주는 리듬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작품 <우주>는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여원에 낙찰되었다고 하니 눈이 휘둥그레해질 밖에 없다. 우리나라 미술품 경매시장 근현대 미술품 경매 옥션에서 상위10위 권 중 8점이 수화 김환기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여태 그 유명한 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게 어쩐지 뒤처진 느낌이 들었다.
![]() |
![]() |
![]() |
아는 만큼 보인다고들 하듯, 김환기의 일생을 그린 책을 읽고 나니 도슨트의 그림에 대한 설명이 낯설지 않았다. 사실은 너무도 힘들어 하고 있는 딸 정선이에게도 잠시나마 좋은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는데 .. 딸 애의 어두운 낯빛은 여전하였다.
김환기의 삶과 예술 <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이경성 지음
주로 작품에 대한 감상 혹은 평가를 김환기가 홍대 교수 시절 같이 활동한 미술평론가이며 오랫동안 김환기와 친분이 두터운 이경성이 글을 썼다. 작가는 김한기의 별세를 두고 '멋이 죽었다.'라고 쓰고 있을 만큼 김환기는 그림 뿐 아니라 문학에도, 성품과 예술성에 깊은 성찰이 있었다.
수화(樹話)는 키 크고 그림도 잘 그리지만 글도 구수하게 잘 쓰는 멋쟁이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다. 이때 수화는 한국 고미술품에 대한 애착과 수집열이 높았기에 닥치는대로 조선 백자를 꽤 수집했으나 피난지까지 들고갈 수 없는 터라 심지어 마루 밑에다 숨겨놓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한다. 6.25동란 중 그는 종군화가였으나 대부분의 예술인들이 그러했듯 그도 생계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그 혼란 중에도 한국의 전통문화며 예술을 논한 진객들이 많았던 것을 보면 참 인생의 멋을 안 선각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든다. 그 어려운 시대에 미술이나 문학을 했던 ...예술혼, 낭만 그런 말들은 어쩐지 요즘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 말이다. 부산 피난 시절, 전쟁이라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절망하면서도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문학이나 그림에의 순수성을 지켜내느라 퍽 힘들었을 것이다. 새를 좋아했던 김환기는 문화예술인들과의 만남의 장면에서 그의 긴 목을 껑청거리며 학춤을 춘다거나 장구통을 둘러메고 민요 <박연폭포>를 부른다거나 혹은 가곡 <내 고향 남쪽바다>를 부르기도 했다는데 수화 김환기의 멋스러움과 순박함이 그의 작품에 이러한 감성들이 다 녹아있구나 싶다.
수화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열정적으로 내조한 이는 부인 김향안 여사이다.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으로 그녀는 시인 이상의 부인이기도 했으나 이상이 요절하는 바람에 이혼녀가 되었고 본명을 김향안으로 바꾼다. 이미 세 딸을 둔 김환기는 부모님이 정해주었던 전처와의 애틋한 정도 없었기에 이혼을 한 상태였는데, 이 둘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환기와의 자유연애를 통해 연인으로, 그리고 결혼한다.
![]() |
![]() |
![]() |
수화 김환기가 사랑한 백자 항아리 |
김환기가 1943년 <문장>에 쓴 그의 미학을 엿볼 수 있는 글인 <화단1년>에 나오는 이중섭의 '소' 그림에 대해 쓴 부분을 인용하자면,"침착한 색채의 개조(改造), 정확한 데포름(deform, 변형), 솔직한 이미지, 소박한 환희,를 가진 작가이다. 솟구쳐오는 소, 외치는 소, 세기의 음향을 듣는 것 같았다. 응시하는 소의 눈동자, 아름다운 애련이었다. ...."라는 평을 읽으니 이중섭의 <소>에 대한 안목도 생기게 하는 지침이 된 것처럼 반갑다.
부농의 아들이었기에 넉넉한 주머니 덕인고로 늘 술값은 김환기의 몫일 정도였던 만큼 씀씀이에 대해 계산적이지 않았다. 자유분방하였기에 그의 그림 세계는 더 넓게 펼쳐져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새를 즐겨 그린 것처럼.. 그러나 점점 형편이 나빠지자 <현대문학> 등의 문학지 표지 그림을 마다하지 않고 그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랑은 수화에 의해 개설되었는데, 홍대 앞에 있는 화가 윤형근(수화 김환기의 사위)의 집에는 '종로화랑' 이라고 새겨진 현판이 있는데 이것이 1930년대말 종로에 개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화랑의 산 증거로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1940년대말 수화가 거주하던 성북동은 너무도 교통이 불편하여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던 곳이지만 김환기는 일찍이 성북동의 아름다움을 보고 거주하였다. 당시의 성북동이라 함은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집에서부터 창경원 담을 끼고 걷는 멋이야말로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특혜라고 말할 정도로 이 담장길을 따라 걷기를 좋아했다는데, 태어나 결혼할때까지 돈암동에 살던 내게도 창경원 담길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1947년 수화 김환기가 주동이 되어 <신사실파>가 발족된다. 창립 동인은 김한기, 유영국, 장욱진, 이규상 4인으로, 당시 화단 또한 정치적 어려운 시대 속에서 갈팡질팡 하던 시기에 예술에 대한 진정성에 뜻을 둔 이들끼리 '새로운 사실화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수화가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게 됨에 따라 동인은 해체되고 만다.
![]() |
![]() |
![]() |
호암미술관 뜨락에서 정선이와 |
1956년 : 파리로 떠난다. 부인 김향안이 1년 먼저 빠리에 도착해 남편이 그림그리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애써 그 환경을 만들어놓았으나 불어를 못하거나 또 넉넉하지 못해 물감을 제대로 구입하지 못할 정도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리에 대해 매우 인상 깊었던 것을 글로 적었다.
"좌우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흐르며.. 애인 없이 혼자서 보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전망이다..." 라고 쓰고 있을 정도다. "이 사람들은 새것 보다 낡은 것을 좋아한다."라는 말에서는 왜 프랑스가 예술의 나라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5,60년대 가난했던 우리나라와 비교되는 내용도 있다. 이를 테면, "콩세르쥬(행랑어멈 정도 되는 최저 신분을 지칭.)의 식탁에도 으레 고기 한 덩어리와 포도주 한 병, 채소,,, 과일, 치즈, 커피 등의 짜임새인데... 잘 먹고 사는 백성들임을 알 수 있다.." 라고 적고 있다.
1959년 : 4년간의 파리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외국에 나가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바꾼 많은 화가들처럼 물들지 않기 위해 일부러 파리의 미술관 관람을 극도로 자제했다고 한다. 홍대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파리행 자금을 위해 팔았던 성북동 집을 떠나 와우산 언덕 위에 집을 전세내어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합승에 매달려 조석으로 한강을 건너는 재미를 알았고,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살며 얼어붙은 한강 줄기를 굽어보며 이런 명당이 따로 없다라고 쓰고 있다. 와.... !!! 인생의 달관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 같아 찡해 온다.
1963년 수화는 제7회 <상파울로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선정되어 브라질로 향한다. 12월이 우리나라에서처럼 삼복더위로 더운 날들이 지속된다는 것과 보랏빛 꽃을 피우는 나무를 보며 지구의 반대편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였다고 한다. 30여년 전 당시 나는 송파구합창단원 시절 해외공연 일정으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 처치에 간 적이 있는데 공원은 물론 곳곳마다 남보랏빛 꽃들로 넘실거리던 장면이 퍽 이색적이었는데, 이는 북반구에 속한 우리나라와 달리 남반구에 위치한 때문이라는 사실에 무척 놀라웠었다. 브라질 역시 남반구에 속해 있으니 그럴 것이어서 수화 김환기가 당시에 놀라워했던 그 놀라움에 사뭇 동감하였다.
1965년 미국 뉴욕으로 떠나는 김환기.
뉴욕 이전에는 한국의 전통과 고미술에 심취했다면 <힌극미술대상전>에서 대상 획득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광목을 캔버스로 하게 됨은 색을 칠했을 때 운연(雲煙)의 효과를 '점묘화'에서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1974년 일기에 보면 그가 점화를 그리면서 매일 일기를 쓴 것이 퍽 이채롭다. 점화의 작업 과정을 일일이 적어둔 것이다. 화폭에 점을 주욱 찍고 점 하나하나를 네모꼴로 둘러싸면서 빛깔을 입히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수백 개의 점을 <#숫자> 즉 <#332 프러시안 블루+블루 블랙 끝내다> 등을 일일이 메모하고 있다.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김환기 미술전> 관람 기회를 얻게 되면서 그분에 대한 책 두어 편을 읽게 되니 알아감에 대한 뿌듯함이 있다. 우리나라 미술계의 거목이 되었던 수화 김환기의 일생을 들여다보며 잠시나마 그분의 화실을 상상으로 넘나들며 그의 붓 작업 속에 들어가 보았다.
수화는 자연 속에서 한국적 미를 끄집어냈고, 특히 달과 하나이 되는 백자를 그려내는 등 한국적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분, 수화 김환기는 그렇게 많은 작품들로 우리와 함께 있다.
![]() |
![]() |
|
왼편의 희미하지만 또 다른 무지개 | 무지개 |
염돈재선배님과 친구 충희, 그리고 딸 정선이와 함께 용인 수지구 냉면 맛집이라는 데서 코다리냉면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또 커피가 일품이라는 카페 <MonPere> 로 향했다. 한참을 달리는데 충희가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어머! 저 무지개좀 봐.!" 저녁 하늘가에 굉장히 커다란 쌍무지개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비가 내린 후도 아닌데 무지개가 뜨다니 마치 좋은 징조인 것만 같아서 괜시리 간절한 바램을 무지개에 올려 놓는다.
커피와 담소로 문화생활에의 목마름을 축인 귀한 시간이었다. 커피 한 잔으로 긴장된 시간을 풀어내자 충희는 핸드폰을 열어 자신이 은퇴 이후부터 시작한 수채화 작품들을 보여준다. 글도 잘 쓰고, 차분하며 따뜻한 면모를 지닌 <여고 동창 최충희>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진다고나 할까. 나 역시 오래전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지만 다가가지 못했고, 여전히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을 뿐이다. 딸 심정선이도 비록 노친들과 함께한 만남이었지만 나름 신선한 부담을 기꺼이 즐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