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공사 佳作(가작) 수상
1971년 4월, 지하철 1호선 착공식이 시청 앞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우리학교 고1 전교생 600여 명은 첫 삽을 뜨는 기공식 축하기념곡인 <지하철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합창단으로서 이 역사적인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지하철이 뚫린다. 600만 시민의 안전과 평화와 부푼 꿈으로,
지하로 벋어가는 겨레의 70년대 또 하나의 기적을 이룩해보자’
라는 이 노랫말은 땅 속으로 기차가 다닐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상상도 못했던 터라 그저 놀랍고도 신기하여 늘 흥얼댔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53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또렷하게 부를 수 있다.
이후 3년여 공사를 마친 1974년 8월15일, 지하철1호선 개통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전에 있었던 광복절 경축식에서 영부인 육영수여사가 저격당하는 비통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날 나는 휴머니스트회 회원들과 함께 계룡산 캠핑 중이었는데, 때 마침 라디오 중계방송을 듣던 중 타당탕!! 하는 어수선함을 전파를 통해 고스란히 들었으며, 순간 나라에 크나큰 변고가 생긴 것을 알았다. 온 나라는 침통함으로 무겁게 가라앉았으나, 그 날 오후 지하철1호선은 계획대로 거대한 메트로 시대를 향한 마중물로 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청량리-서울역을 오가는 짧은 단선 구간이던 1호선조차 놀라움으로 바라보았던 터였는데, 50여 년이 지난 오늘날 9호선은 물론 공항철도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방대한 그물망으로 벋어나갈 줄 짐작이나 했을까.
수십 년 간 여기저기서 지하철공사로 불편한 적이 많았지만, ‘Subway becomes easier, travel becomes easier.’라고 쓰여진 전철홍보물이 말해주듯, 지하철은 편리하고 쉬운 교통 수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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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 나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Hu 써클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첫 모임에서 그만 단 번에 어떤 선배에게 시선을 빼앗겼드랬다. 지하철이 개통된 지 1주일이 지난 즈음, 나는 바로 그 선배님과 함께 종로5가 역에서 지하철을 처음으로 타 보는 기분 좋은 시간을 갖게 되었다. 땅 속으로 기차가 달린다는 빅뉴스 이후 누구보다 먼저 지하철을 타 보았다는 사실은 나름 자랑거리였다. 어느덧 가슴 콩닥이던 스무 살 청춘은 흘러가버렸지만 그 날의 지하철 데이트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서클의 선후배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간히 모임으로 연결되고 있기에, 나는 더러 그 선배를 만날 수 있는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의 모습을 볼 수도 없고 연락조차 되지 않으니, 아마도 투병 생활로 힘들어하고 있을 거라는 추측은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74학번 새내기, 74년 개통된 1호선 열차의 첫 탑승의 순간을 함께 했던 사람, 그 해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30주년 기념음악회>의 김남윤 바이올린 콘서트에 가기 위해 장충동 언덕길을 같이 걸으며 설레던 시간. 서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는 구실을 들어 명동 <필하모니 음악감상실>을 함께 들락거렸던 풋풋하던 우리의 젊은 날들은 이제 흑백영화의 장면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지공맨’이 되던 날이 생각난다. 1년 이상 빠르게 되어 있는 억울한 내 생일 때문에 일찌감치 받게 된 ‘지하철 공짜카드’는 솔직히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새 경로 우대에 익숙해진 나를 보면서 고개를 내젓곤 한다.
전철 벽면에 붙여진 단촐했던 1호선 구간 노선도는 운행역이 늘어남에 따라 한두 정거장 씩 새로운 스티커로 덧대어졌으며,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환승역들을 거치면 못 이를 데 없을 만큼 힘차게 벋어 나갔으니, 그야말로 <지하철의 노래>의 노랫말에서처럼 ‘겨레의 70년대’는 기적을 잉태했던 것이다.
지하철과 함께 달려왔던 기나긴 세월을 지나 젊은 그대들은 은발이 되어 저마다 추억의 사진들을 이처럼 꺼내보고 있을까. 가끔 서글프긴 하지만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주어진 이 시간을 감사하며 메트로 시절을 즐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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