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들

因緣 - 피천득 著

라일락74 2013. 2. 22. 11:15

 긴 겨울 방학 내내 무언가에 쫒기는 듯한 ... 시간이 분명 남아 도는데도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病은 아니지만 분명 무슨 증상 같기는 하다.   그럴 즈음 책을 읽으면 좋을 텐데...  수 십 년 전의 나 같으면 당장 책을 집어 들었을 텐데 머릿 속에서는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도 육신은 자꾸 멈추기를 계속한다.

 그리하여 학교 도서실 書架로 가서 무슨 책을 읽을지 고르기를 또 한참 망설인다... 아마도 그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자신이 없어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눈에 다시금 들어 온 것이 바로 수필집 '인연'이다.

 금아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 은 이미 오래 전에 읽은 터이지만 요즘 세대들의 입맛에 맞게 감각적으로 쓰여진 수많은 수필집과 비교해보고픈 생각이 들어 집어 들게 된 것이다.  70년대 초 고등학교 시절, 지금으로 말하면 '설문조사'에 해당하는 뜻인 '앙케이트' 돌리기가 대단히 유행했었다.  상대방이 나에게 갖고 있는 생각들 또는 상대방 자신의 일상적 생각들을 간단하나마 질문과 답 형식으로 노트에 받아두곤 했다. 그 설문 문항 중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 뭐 이런 식의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학급 친구들이 대부분의 설문 대상자들이었으나 같은 교회에 다니던 K(#강원혁)라는 남학생에게도 설문지를 받았었다. 그런데 그가 써 준 댓글은 상당히 신선하였으며 또한 공감되는 바 많았기에 아직까지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도저히 남학생이 쓴 글씨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또박또박하고 예쁜 글씨로 자신이 가장 재미있고 감명깊게 읽었던 책은 바로 '고 1 국어책' 이라고 적었던 것이다.  '엥??? 소설 ? 뭐 이런 걸 적을 줄 알았는데 교과서??  고1 국어책이라고??'  하지만 나는 곧 이에 몹시 동감하였다. 왜냐하면 내 경우에도 학년 초 처음 받아든 玉 빛 감도는 고1 국어교과서 읽기를 좋아했다. 여고생의 여린 감성을 끌어내 줄 수필들이 기억에 남는데, 이를 테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라던가 영문학자이기도 한 이양하의 '신록예찬' 과 민태원의 '청춘예찬' 같은 수필들은 제목만으로도 설레게 하는 마법이 있었다.  그 밖의 수필과 소설들이 대부분이었던 국어책을 정말 좋아했는데   바로 그 곳에 피천득님의 '수필'이라는 제목의 수필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蘭이요, 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로 시작되는 이 수필이 실려 있는 것이 바로 그의 유일한 수필집 '인연'이다.

 

 금아 피천득은 수필가이면서 詩人이며 영문학자로 내가 좋아하는 타이틀이 다 붙어 있다. ㅋ

 짧고 간결하지만 평범한 일상에서 묻어나오는 따뜻함이 물씬한다.  아주 오래 된 글이지만 겸손하고 따뜻하고 그 마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읽는이로 하여금 한없이 부끄러워지게 하는 글이다.

 

 '타이피스트, 얘기가 나오는데 워드 프로세싱에 익숙한 요즘 애들이 '타이피스트'라는 낱말을 알기는 할까?  아, 오래된 직업 이름이구나 싶다.

 

< '호이트 컬렉션'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보면 서두에 "챨스 먼치가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으시겠습니다"하는 아나운서의 말을 들을 때면 심포니 홀을 생각하고, 연달아 보스턴 박물관을 연상한다.'>라고 쓰여진 귀절을 보자면,

 엥??? '챨스 먼치???  클래식 음악을 나름 좋아하는 나는 한 20여년 전 KBS 1 FM 클래식 방송모니터를 하느라고 3년 동안 하루 3시간씩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모니터링 한 적이 있어서 많은 작곡가나 지휘자 및 연주자들의 이름을 매일 원어로 적어야 했다. 그 때 아나운서는 프랑스 출생 지휘자인 'Charles Munch'를 '佛語式 발음으로 '샤를르 뮌쉬'라고 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琴兒가 글을 쓴 당시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英語式으로 '챨스 먼치'라고 했던 거로구나 하는데 이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도 세월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후반부에는 수필집 제목 '인연'이 말해 주듯 .. 살아오면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과 정신적 깊이가 남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그 중.. 美國의 시인 Robert Frost(로버트 프로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은 범속한 사람이나 그를 만났었다는 사실이 영광스럽다는 기쁨과 겸손함을 '남의 광영을 힘입어 영광을 맛보는 '반사적 광영'이라는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람은 잘난 맛에 산다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이 반사적 광영이 없다면 사는 기쁨은 절반이나 감소될 것이다." 라고... 

 

 
  •  열일곱 살에 만난 아사코라는 일본 소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지닌 채 십 수년만에 미국 출장길에 동경에 들러 다시 만난 아사코는 백합같은 추억 속의 소녀가 아니었다. 겨우 세 번 만난 여자였으나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금아는 사라져버린 아름다움에의 서운함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아니 만나면 좋았을 사람에 속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  "인연" 의 뒷부분에 가면 琴兒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 -도산 선생: 나라의 재목이 될 나무들을 심고 간 분, 풍채가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런 몸가짐과 목소리, 가난하지만 청초하고 세밀한 정서를 지닌 분으로 묘사함
  • -春園 :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았으나 다른 이들을 비난하지 않았던 분...
  • -세익스피어, 도연명을 좋아함
  • 로버트 프로스트 : 미국 유학 시절 프로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숲 속 두 갈래 길을 노래한 프로스트의 손은 농부의 거친 손과 같지만 소박하며 그의 말은 형용사보다는 쉬운 動詞 를 많이 쓴다고 .... 
  • 챨스 램 : 영문학을 전공했다면 찰스 램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미 오래 전 기억 속에 묻혀 있다 할 지라도 그의 수필집 '엘리야'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작은 사치와 오래된 책, 그리고 오랜 작가, 그림과 도자기를 사랑한 이로 언급하고 있다.

餘心 : 소설가 주요섭을 말함.  그의 대표 소설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피천득님과 그의 어머니의 에피소드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 옛날 스탠포드 대학교에 다녔던 당대의 지식인과 함께 숙식 했던 인연을 쓰고 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 이름을 생소해 할 Joseph Conrad 를 서로 논했다니...  부러울 뿐이다.

 

 

 1980년 미국 大選을 앞두고 우리나라 신문지상에는 당시 대통령 후보이던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후보의 이름을 '리건'이라고 했었는데 조금 지나 '레이건'으로 바꾸었던 기억이 난다.  영문명으로 볼 때 '리건'으로 불리워지겠거니 했지만 아마도 미국 본토에서는 그 분의 이름이 '레이건'이라 불리우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지금보다는 영어나 불어의 친밀도가 훨씬 낮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젊은이들은 피천득이 누군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이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는 더 이상 나에게는 그 옛날의 수필이 들어 있지 않은 너무도 사고력을 요하는 어려운 글 가득한, 내 추억 속 잔잔함을 전해 주는 그런 책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