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 방학 내내 무언가에 쫒기는 듯한 ... 시간이 분명 남아 도는데도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病은 아니지만 분명 무슨 증상 같기는 하다. 그럴 즈음 책을 읽으면 좋을 텐데... 수 십 년 전의 나 같으면 당장 책을 집어 들었을 텐데 머릿 속에서는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도 육신은 자꾸 멈추기를 계속한다.
그리하여 학교 도서실 書架로 가서 무슨 책을 읽을지 고르기를 또 한참 망설인다... 아마도 그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자신이 없어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눈에 다시금 들어 온 것이 바로 수필집 '인연'이다.
금아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 은 이미 오래 전에 읽은 터이지만 요즘 세대들의 입맛에 맞게 감각적으로 쓰여진 수많은 수필집과 비교해보고픈 생각이 들어 집어 들게 된 것이다. 70년대 초 고등학교 시절, 지금으로 말하면 '설문조사'에 해당하는 뜻인 '앙케이트' 돌리기가 대단히 유행했었다. 상대방이 나에게 갖고 있는 생각들 또는 상대방 자신의 일상적 생각들을 간단하나마 질문과 답 형식으로 노트에 받아두곤 했다. 그 설문 문항 중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 뭐 이런 식의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학급 친구들이 대부분의 설문 대상자들이었으나 같은 교회에 다니던 K(#강원혁)라는 남학생에게도 설문지를 받았었다. 그런데 그가 써 준 댓글은 상당히 신선하였으며 또한 공감되는 바 많았기에 아직까지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도저히 남학생이 쓴 글씨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또박또박하고 예쁜 글씨로 자신이 가장 재미있고 감명깊게 읽었던 책은 바로 '고 1 국어책' 이라고 적었던 것이다. '엥??? 소설 ? 뭐 이런 걸 적을 줄 알았는데 교과서?? 고1 국어책이라고??' 하지만 나는 곧 이에 몹시 동감하였다. 왜냐하면 내 경우에도 학년 초 처음 받아든 玉 빛 감도는 고1 국어교과서 읽기를 좋아했다. 여고생의 여린 감성을 끌어내 줄 수필들이 기억에 남는데, 이를 테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라던가 영문학자이기도 한 이양하의 '신록예찬' 과 민태원의 '청춘예찬' 같은 수필들은 제목만으로도 설레게 하는 마법이 있었다. 그 밖의 수필과 소설들이 대부분이었던 국어책을 정말 좋아했는데 바로 그 곳에 피천득님의 '수필'이라는 제목의 수필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蘭이요, 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로 시작되는 이 수필이 실려 있는 것이 바로 그의 유일한 수필집 '인연'이다.
금아 피천득은 수필가이면서 詩人이며 영문학자로 내가 좋아하는 타이틀이 다 붙어 있다. ㅋ
짧고 간결하지만 평범한 일상에서 묻어나오는 따뜻함이 물씬한다. 아주 오래 된 글이지만 겸손하고 따뜻하고 그 마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읽는이로 하여금 한없이 부끄러워지게 하는 글이다.
'타이피스트, 얘기가 나오는데 워드 프로세싱에 익숙한 요즘 애들이 '타이피스트'라는 낱말을 알기는 할까? 아, 오래된 직업 이름이구나 싶다.
< '호이트 컬렉션'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보면 서두에 "챨스 먼치가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으시겠습니다"하는 아나운서의 말을 들을 때면 심포니 홀을 생각하고, 연달아 보스턴 박물관을 연상한다.'>라고 쓰여진 귀절을 보자면,
엥??? '챨스 먼치??? 클래식 음악을 나름 좋아하는 나는 한 20여년 전 KBS 1 FM 클래식 방송모니터를 하느라고 3년 동안 하루 3시간씩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모니터링 한 적이 있어서 많은 작곡가나 지휘자 및 연주자들의 이름을 매일 원어로 적어야 했다. 그 때 아나운서는 프랑스 출생 지휘자인 'Charles Munch'를 '佛語式 발음으로 '샤를르 뮌쉬'라고 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琴兒가 글을 쓴 당시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英語式으로 '챨스 먼치'라고 했던 거로구나 하는데 이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도 세월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후반부에는 수필집 제목 '인연'이 말해 주듯 .. 살아오면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과 정신적 깊이가 남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그 중.. 美國의 시인 Robert Frost(로버트 프로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은 범속한 사람이나 그를 만났었다는 사실이 영광스럽다는 기쁨과 겸손함을 '남의 광영을 힘입어 영광을 맛보는 '반사적 광영'이라는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이 반사적 광영이 없다면 사는 기쁨은 절반이나 감소될 것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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餘心 : 소설가 주요섭을 말함. 그의 대표 소설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피천득님과 그의 어머니의 에피소드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 옛날 스탠포드 대학교에 다녔던 당대의 지식인과 함께 숙식 했던 인연을 쓰고 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 이름을 생소해 할 Joseph Conrad 를 서로 논했다니... 부러울 뿐이다. |
1980년 미국 大選을 앞두고 우리나라 신문지상에는 당시 대통령 후보이던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후보의 이름을 '리건'이라고 했었는데 조금 지나 '레이건'으로 바꾸었던 기억이 난다. 영문명으로 볼 때 '리건'으로 불리워지겠거니 했지만 아마도 미국 본토에서는 그 분의 이름이 '레이건'이라 불리우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지금보다는 영어나 불어의 친밀도가 훨씬 낮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젊은이들은 피천득이 누군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이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는 더 이상 나에게는 그 옛날의 수필이 들어 있지 않은 너무도 사고력을 요하는 어려운 글 가득한, 내 추억 속 잔잔함을 전해 주는 그런 책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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