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두 딸들과 아들 ... 의 귀국을 기다리며...

라일락74 2014. 7. 18. 08:19

 

01
 
02
 
03
2차 시험이자 졸업연주회
 안내 포스터
  바이올린을 둘러 멘
작은딸 심또니
  꽃다발 받고 즐거워하는
또니 -  with whom?

 

  

   2014. 7. 18  Fri.

  우리나라 시각으로 오늘 새벽 1시 . 드디어 딸내미 심정선(Jungsun Shim)의 마인츠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의 마지막 학기인 석사 학위 취득을 위한 졸업연주회가 있었다. 지난 7일 1차 연주 시험을 통과하고 2차 시험이나 마찬가지인 졸업연주회에서도 합격 점수를 받아야 무사히 Master Degree 를 받을 수 있다.

 어젯밤 기도로 마무리하고 잠 자리에 들었는데 온통 그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인지 꿈 속에서도 선명하지는 않으나 코발트 色 바탕에 예쁜 무늬가 그려진 동네?? 에서 즐거워하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자랑스러운 그 자리에 엄마의 자격으로 참석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되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독일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정선이를 격려하기 위해 연주회장에 찾아주었다. 만하임사랑교회 진봉준 담임목사님과 권사님들... 친구들  고맙습니다.    

                                                   

 



 
 
 
2014. 7. 17
마인츠대학원 
졸업연주회
  만하임 사랑교회
진봉준 목사님
  졸업장 받는 프라우 심
Frau Shim

in Hoschule Musik
in Mainz

   현악기 전공생치고는 바이올린을 상당히 늦은 나이에 시작했던 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방과후 특활반 활동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며 졸라댔던 아이.   딸 아이의  쬐끄만  손에 맞는 바이올린도 없으니 꼭 배워야겠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썼던 그 바이올린이 있지 않느냐며 그거면 된다고 우겼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학교에 현악반이 신설되었는데, 나는 그 당시 현악반 애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겨우 2~3년 연습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예배 때마다 강당 앞 쪽에서 찬송가 연주를 하는 그들이 못내 부러워 바이올린 첼로를 배우는 애들이 어떤 면면을 지녔는지도 슬쩍 살펴보곤 했을 정도다. 아무튼 대학 졸업 후까지도 바이올린을 너무 배우고 싶어 1년 짜리 적금ㅡ 그러나까 한 달에 1,000 원씩 납입하니  14,000원이 되었는데 그 돈으로 당시 한참 유행하던 신앙촌이라 불렸던 시온(Zion) 바이올린을 샀고, 전공하는 친구로부터 몇 달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돈과 연습이 필요한 것을 알고 그만두었다.  넓은 잔디밭이 있는 집에 살고 있던 동창네 집에서의 일이다. 그 친구의 바이올린에서는 어쩐지 은은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울려나왔었기에 얼마짜리냐고 물었었다. 그녀의 말... 이거 줄 값만 해도 2천원이라고 ...  그럼 바이올린은??   220만원.. 이라고 했다. 아니 내 바이올린과 어찌 비교될 것인가.  그렇게 바이올린에 대한 열망이 있었음에도 부잣집 애들이나 배우는 거라는 고정관념이 생겨 버렸다. 요즘 가격으로 환산해 보면 2억이 넘는 악기였던 것이다. 

  그런 나름 열등감을 갖고 있던 엄마에게 딸 정선이는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했던 것이고, 그렇게 해서 제 손에 맞지도 않는 크기의 성인용 바이올린을 만지게 된 게 악기를 배우게 된 계기이다. 또한 바로 그 악기가 그 옛날 내가 샀던 그 악기임은 두 말 할 나위 없다. 아무튼 학년 말이 되어 당시 24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1년간 배운 바이올린 솜씨를 학부모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아무리 쉬운 곡이지만 교실에 있던 피아노로 즉석에서 악보도 없이 단지 음을 듣고 나름대로 반주를 해 주어 23명 아이들의 연주를 훨씬 빛나게 해 준 애가 바로 딸 심정선이다. 그 때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놀라워하셨고 우리 딸을 자신이 가르치고 싶다고 제안해 왔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하철도 연결되지 않았고 교통편도 매우 불편한 지역이던 과천까지 딸 애를 데리고 다닐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공짜로 레슨해 준다는 게 고마우면서도 전공할 것도 아닌데 뭐 하는 생각에 그 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그 이후로 때로 내 섣부른 판단으로 하여금 딸애가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너무 돌아가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괴로웠던 적이 많다. 다만 동네에서 교회의 박경희 선생님에게 몇 달 정도 레슨을 받고  기회 될 때마다 대학생으로부터 레슨을 받은 게 고작이었다. 일반 공부를 하느라 악기를 손에서 떼게 될까봐 <송파구청소년교향악단>  활동을 정기적으로 하도록 하여 음악에의 끈을 놓지 않은 것 뿐이다.

 

  화학 과목을 제법 좋아했던 딸 애는  수시입학 전형 마지막에서 떨어지고 어찌하다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후 한 학기를 마쳤을 무렵  대학도,  학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차석 장학금도 마다 하고 그 때부터 휴학을 한  후 7월 말 경부터 겨우 넉 달 정도 레슨을 받고 결국 음악대학으로 노선路線을 바꿨다. 우회했던 길에서 돌아와  마침내 음악 대학에 입학하였던 것이다.  딸 애의 음악적 재능에 감사하면서도 사실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엄청난 연습의 결과를 필요로 하는 것을 알기에 걱정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빠르고도 부드러운 손가락의 움직임을 연마해 온 수많은 바이올린 전공자들 틈에서 연주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 한 딸이 겪을 고난이 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독일 유학을 꿈꾸었다. 

 

  누구보다 본인 자신이 그런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연주 실력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해 주고 도와주었다. 특히 독일 만하임 사랑교회 진봉준 목사님의 기도와 격려 덕분에 유학 생활을 시작했던 걸 떠올리며 감사할 따름이다.

 

  눈물, 노력과 긍정적 마인드 콘트롤을 거듭하며 졸업 연주에서 합격점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8 월말 귀국을 앞두고 설레고 있다. Mainz 마인츠 국립대학교 대학원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과 함께 찾아왔던  우왕좌왕 엄청나게 힘들었던 입학 해프닝..  그걸 어떻게 다 말할 수가 있을런지.. 이 대학원 입학 합격통지서와 불합격 통보가 겹치면서 오류가 난 이유로 인해 너무도 고통받았던 딸..  이 상황에 도움을 달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요청하였던 일들... 그렇게 영사관에서도 잘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딸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었던 분들.. 그리고 눈물.. 오죽하면 프랑크푸르트 영사관에서 '프라우 심'(Frau Shim)이 잠깐 동안이긴 하지만 입에 오르내렸겠는가...   딸 애는 말했다.. 자신이 약 4년여 간 겪었던 독일에서의 생활을 다 기록하려 들자면 아마도 책 한 권 분량으로는 차고도 넘칠 것이라고 했다. 더 나은 음악 공부를 위해 독일로 떠난 지 어언 4 년.. 유학생으로서의 생활로 보자면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닐 지 모른다. 석사 과정만 마치고 오겠다는 결심을 한 이상 4 년이라는 세월은 엄마인 나에게는 퍽 길게 느껴진다.

   San Diego 대학에서 영어 연수 Admission 을 받았을 때 기뻐하던 아들 심준용. 어학연수를 떠나겠다고 마음 먹은지 겨우 한 달 여만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미국에서 거처할 숙소도 미처 마련하지 못한 상태로 떠나야 했을 만큼 긴박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새벽기도 후 tea time 때 우연히 림형천 담임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었을 때 이러한 어려움을 말씀 드리자 목사님께서 그 자리에서 미국에 전화를 걸어 주셔서 준용이가 우선 머물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덕분에  샌 디에고 공항에 전도사님이 마중 나와 주시고.. 며칠 후 겨우 침대 하나 만을 얻어 공부를 시작한 준용이는 그 동안 열악한 먹거리에도 마냥 행복해 했다. 

 

  겨우 8개월 남짓 연수를 받았다지만 그래서 최선을 다 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막상 미국 대학에서 공부를 좀 하고 보니 아예 미국 대학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한다.  3수를 했던 아들이기에...  또 복학, 취업 등 나이 계산도 해 보고... 직업도 생각해 보고...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귀국 직전 Peru 선교 여행을 다녀온 것도 큰 경험이었던 것 같다. 축구, 야구는 물론이요 볼링, 테니스 등 각종 운동을 멋지게 해 내는 아들... 샌디에고의 푸르디 푸른, 맑은 하늘이 너무 좋아서 거기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다음 달 하순경 귀국을 앞두고 있다. 귀국하기 전 한 달 여를 꼬박 여행에 시간을 투자하겠다고.  밥도 제대로 해 먹지 못 하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맘 놓고 돈을 쓸 여유 없음에도 엄청 미국 생활을 즐기는 아들 ... 또한 얼마나 기특한지. speaking 의 어려움을 절감하지만 그래도 writing 은 그럭저럭 upgrade 된 것 같다. 이제 자신의 미래에 대한 vision 도 그리고 삶을 더 열정적으로 채울 것이다. 

 

01
 
0
 
03
요세미티 국립공원
(Yosemite) 內

레드우드 포레스트 자이언트 세콰이어
Redwood Forest

giant sequoia 
   테니스 선수 보다
더 멋진 포즈 준용
-샌 디에고에서
  아름다운 풍광 자랑하는
샌디에고
San Diego

 

01
 
02
 
03
Grand Canyon 캠핑을
위한 렌트 카 
  Surfing  어쩔 거니?  아들아.. 스포츠 재능    서부여행 중

 

  짧지만 형편 되는 만큼만 영어 공부를 위해 애썼을 테고.. 이제 돌아올 때가 되니 아쉬움이 많은 것 같다. 정말 젊음이 좋은 것임에는 분명하다.

. '도전과 패기' 라는 말이 적절한 시기에 있는 준용이. 그랜드 캐년의 어느 곳에서의 hiking이 개 힘들다고 표현할 만큼 신체를 단련할 수도 있고... 섭시 49도 정도 된다는 Death Valley 도 지난 듯하다.

 

 딸 애가 독일에 가 있는 4년 동안 벌써 준용이는 空軍 복무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어느 새 미국 서부 샌디에고 대학에 영어연수를 위해 가 있다. . , 아!!  4 년 만에 가장 적절하고 멋진 근거로 다섯 식구가 모일 시간이 다가 오고 있다.

 

 큰딸 내미 심정민도 올해 2월,  미국 서부에 위치한 치코(Chico)  에 있는 CSU(California State University) 대학에 영어과 교사연수를 다녀왔다. 이렇게 세 아이들이 올해 같은 기간에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active 하게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여전히 고달프게 느껴질 때 많다. 내 노력과 정성이 공중분해 되던 날..,  나를 너무도 아프게 했던 ..  부끄럽고 어이 없는 사연들이 내게 있었다.  말하지 못하고 ... .. 로 인해 가끔 흘리는 눈물은 꿀떡 침 삼키듯 .. 멈추려고 한다.  자신 없지만.. 나의 이 어여쁜 세 아이들이 있기에 ...

 C'est la vie !  La vie est ga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