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들

신간 꽂이에서 만난 「시인 동주」- 안소영 著/창비 刊

라일락74 2016. 9. 22. 09:38

 

  2016. 8월

 

  얼마 전, ‘한국 문화의 이해’ 라는 주제로 조선의 역사, 회화, 지리, 궁궐, 음악 및 문학을 아우르는 교사 연수 프로그램에 참석하였다.  각 3 시간 짜리 수업임에도 2 주가 금방 지나갔을 만큼 얼마나 재미있었던 지 매일 푹 강의에 초 집중하느라 학교에서 우면산 연수원까지 불편한 교통편임에도 힘든 줄 모르고 열심을 냈다.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재미에 놓치고 싶지 않던 강의 중에도 특히 '한국 문학' 편에서 다룬 누구도 재현 불가능한 ‘윤동주 詩’만의 모노크롬이 있다는 데에 그 위대함이 있다는 ‘윤동주 문학’ 수업에 푹 빠졌드랬다.

 

 중국은 용정 명동 촌에 시인의 생가를 복원하여 낯을 세우고는 마치 윤동주가 중국 소수 민족인 조선족인 양 ‘중국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돌비석에 크게 새겨 놓았다. 우리가 관심을 못 돌리던 틈에 슬쩍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의 한 전략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늘 제 때 타야 할 열차를 놓치고 마는 것 같아서 너무도 안타까웠다. 

 

  오래 전 그 지역을 들렀던 남편이 윤동주 묘를 보고 왔다며 휑 하니 남은 묘비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저 시인의 묘가 먼 곳에 쓸쓸하게 남아있구나 하고 생각한 정도였다. 작고 70 주기인 2015 년에 이어 내년이면 탄생 100 주년이 되는 즈음에 있어 윤동주 시인을 영화나 책으로도 재조명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나 또한 도서관 신간본 꽂이에서「시인 동주」를 찾아내고는 어찌나 반갑던지. 돋보기 없이는 몇 줄도 읽을 수 없는 내 老眼이 야속했지만 그렇게 ‘시인 동주’를 만났다.

  

  1938년, 동주는 스물두 살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진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경성역에 도착한다. 북간도에서부터 긴 시간 열차를 타고 새로운 삶에의 기대를 안고 경성에 들어섰건만 눈살 찌푸려지는 일장기며 주재소 등 온통 일제의 그늘에 드리워진 식민지 조국의 서글픔 뿐이다. 연희전문을 다니게 된 그들은 당시의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최현배 등 저명한 교수들의 수업을 들을 수 있음에 행복해 하지만 일제의 압박이 점차 심해짐에 따라 급기야는 강단에서 많은 교수들이 떠난다.

 

  또한 말과 글로 민족을 일깨우던 문학인들조차 일제의 압박을 견디지 못 하고 붓을 꺾고 친일로 돌아서는 상황에서 청년들의 고뇌는 깊어진다. 섬세하고 말 수 적은 동주는 사색으로 침잠하고 마음 속 깊은 데서 길어 올리는 서늘한 언어로 자신을 성찰할 뿐이다.

   

  글을 읽다 보니 동주와 벗들이 함께 나들이 갔던 혼마치, 진고개 등의 경성 번화가는 요즘의 명동과 충무로라는 것과,  오래 전 어른들이 걸음마를 배우는 아가들의 손을 붙잡아 주며 ‘부라부라’ 했던 동작어들이 일본말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전차를 타기 위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전차 종점이던 돈암동까지 걸어 갔던 까마득한 어린 시절과 유진오, 이광수, 김동리, 김동환, 정지용, 박목월, 박두진 등 수 많은 문학인들과 그 작품을 배우던 중 고교 시절의 국어 시간은 물론, 명동 거리 쏘다니며 다방에 드나들던 70 년대 대학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안정적인 직업을 얻기를 바라는 집안의 기대와 달리 이들은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이 문학이거나 또는 현실 참여이거나 방법은 조금 달라도 조국의 독립을 갈구한다. 무엇에든지 늘 앞서가던 송몽규가 독립군에 가담한 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사실과 비슷한 이유로 인해 학교를 떠나는 많은 벗들을 바라보고 아파하는 동주. 철저한 언론 검열로 마음 놓고 글을 쓸 수 없는 위태로운 삶을 바라보며 ‘슬픈 족속’, ‘십자가’ 같은 시를 쓰며 고통을 나눌 뿐이다. 

   

  1940년 어느 날 조선일보에 징용에 관한 글을 기고한 글에 감동 받은 동주는 글을 쓴 정병욱을 찾아가고, 둘은 시인이 죽기 전까지 깊은 우정을 나눈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벗들이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받는 등 위태롭게 되자 동주는 절망의 시대를 선포하며 시를 쓰지 않겠노라한다. 그러나 글은 동주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었으니.. 결국 그가 꺼낸 아름다운 언어들은 ‘별 헤는 밤’을 수 놓고야 만다. 

 

   진주만 공습으로 기세등등하던 일제가 급기야 조선 청년들을 강제 징병하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자, 동주는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유학을 떠난다. 유학생 신분이 되려면 창씨개명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현지에서도 유학생들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당하는 생활도 만만치는 않았다. 2차 세계 대전 발발과 연합군의 연이은 승전으로 일본이 패망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소문이 은근하게 떠돌자 일본의 발악은 극에 달한다. 결국 일본의 패전을 입에 담았다는 구실로 몽규와 동주가 연행되는데, 이렇듯 조선 청년들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로 위태로웠다. 치안유지법 위배 명목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이동 수감되었던 동주와 몽규는 많은 조선인들과 함께 고문을 당함은 물론 강제로 주사약을 투입당한 채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조국의 해방을 못 보고 감옥에서 겨우 스물 일곱 해의, 짧디 짧은 생을 마감한다. 

 

   직접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것도 일본에 유학 와서 시를 쓴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며 괴로워했으나 조국의 슬픔과 분노를 시에 담아낸 시인 동주는 소설에서처럼 형무소 담장 너머 창 밖의 별에게로 갔다. 그가 사랑하던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어머니를 담은 채 ....그의 시는 우리들에게 맑은 영혼으로 살아 있다.

   

 소설의 끝 부분인 윤동주 송몽규 추도회 장면에서는 왈칵하여 눈물이 솟구쳤다. 당대를 주름잡던 많은 문인들이 회유 당하여 일제를 찬양할 때 묵묵히 자신을 성찰하고 아파하던 시인 동주. 그의 시들은 동주의 절친했던 친구인 강처중과 정병욱에 의해 조심스레 간직 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추도회에 모인 청년들도 누구하나 징병이나 감옥살이에서 겨우 살아 남았던 이들로서 해방된 조국이라고는 하나 모두들 무거운 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 윤동주의 유고 시집인,「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될 수 있었음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살아있을 때는 미처 발표되지 못한 시들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시인 동주는 시인 윤동주가 되었다. 「시인 동주」를 통해 다시 한 번 윤동주를 만났고, 송몽규와 같은 청년들도 보았으며, 글에 소개된 ‘동주의 시’들을 천천히 음미해 본 것도 기쁨이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리고 나 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야겠다’라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수동적으로 주어진 험난하고 만만치 않음을 예견했을까? 차가운 형무소 바닥과 고문보다 말과 글을 뺏긴 감옥 생활이 더욱 괴로웠던 젊은 동주. 우물 속에 비친 한 고독한 사나이를 ‘자화상’으로 고백하는 시인의 흐느낌에 독자들도 가만 흐느끼는 게 아닌가. 미루어 두었던 독후감 숙제를 급하게 하듯 워드 자판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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