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들

다시 읽어 보는「난중일기 亂中日記」

라일락74 2016. 9. 23. 08:49

2016. 7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고 충무공 이순신을 더욱 좋아하게 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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亂中日記 국보 제76호 -
충남 아산 현충사
   해군사관학교
전시관

충무공 초상화
  거북선 

 

 ‘충무공이순신’은 수 백 년을 아우르는 민족의 자긍심과 감사함의 아이콘이다. 어떤 잡지에서 읽었던 것 같다. 한국인 젊은이가 어느 일본 상점에 들어갔는데 상점 주인인 일본인이 말을 건넸다.  서로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국인은 자신은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일본인 사장은 그렇게 말하는 상대방에게 그러면 그분의 해전에 대해 설명해 달라더란다. 그러나 막상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고, 그저 너무도 유명한 전술로 잘 알려진 ‘학익진..’ 하며 얼버무렸다. 그런데 정작 그 일본인은 자신도 충무공을 존경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충무공의 전법에 대해 막힘 없이 뚜루루 설명하는 것을 보고 몸 둘 바를 몰라 몹시도 부끄러웠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순신을 존경한다는 대부분의 우리네들 또한 충무공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내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지난 해 전쟁기념관에서 진행하는 교사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었다. 그 중 진해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하는 일정이 포함되었는데, 바로 거기서 충무공에 대한 권위자로 잘 알려진 해군사관학교 교수님의 명강의를 들을 기회를 가졌다. 두 시간이라는 짧은 강의였지만 시청각 자료를 보면서 명쾌하고 상세한 강의를 통해 충무공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를 잘 알게 되는 시간을 가져 무척 행복했었다.  마침 지난 5월, 내가 활동하고 있는 휴머니스트회의 고향방문 여행으로 남해 일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일정 중 이순신장군의 마지막 해전지였던 노량 앞바다 기슭에 충무공이라는 큰 별의 스러짐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이락사(李落祠)에 들러보는 일이 전혀 낯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꽤 오래 전 대충 읽었던 적이 있는 ‘난중일기’를 다시금 꼼꼼히 읽어 보기로 한 것이다. 위대한 인물에 대한 낯설지 않음을 바닥에 깔고 다시금 읽어보는 난중일기. 간결한 문체에 녹아 있는 ‘효 충 애’로 다져진 충무공의 인품의 엄청난 깊이에 숙연해졌다.

 

  ‘난중일기’는 자기 관리가 투철한 충무공이 늘 기록해왔던 일기 중 임진년 정초부터 정유재란까지의 일기만을 따로 엮어 훗날 왕실에서 ‘난중일기’로 이름 붙인 것이다. 필기구 사용도 수월하지 않았을 전란 중임에도 하루도 빠짐 없이 일기를 쓴 그 분의 성실함에 먼저 놀라게 되고 성찰과 리더십을 지켜낸 충무공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싶다. 

 

 충무공은 그야말로 탁월한 관찰가였다. 이를 테면 된바람, 높새바람, 샛바람, 마파람, 하늬바람 등의 바람의 성질이나, 안개비, 조금 오는 비, 삼대 같은 비, 궂은비, 오락가락하는 비, 장맛비, 퍼붓는 비, 가랑비 등으로 매우 구체적으로 바라본다. 해전에 있어 날씨 만큼 중요한 게 또 어디 있으랴. 끊임없는 관찰과 정확한 기록이야말로 승리로 내닫는 전략의 근원이 되었을 것 같다.

 

  ‘십만양병설’은 물론 왜의 침략 정보에도 눈 어둡던 조정은 전란이 발발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임금이 의주까지 피난을 가는 형국으로 치닫는데 이었다. 부산진을 거쳐 한양도성을 지나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치며 승승장구하던 왜군들에 맞서 조선군은 안간힘을 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수 년간의 소모전 양상에서 명나라의 개입과 군수물자 부족 등으로 인해 일본군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에 놓이는데, 이는 바로 충무공이 이끄는 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의 군수물자 이동 등에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왜군들이 조선수군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던 혁혁한 전승 덕분이었다.

 

  겨우 열두 척의 배를 ‘열두 척이나 남은 배’가 있다며 위기를 긍정의 눈으로 풍전등화의 위태로운 상황을 통 큰 뱃짱과 통찰력으로 맞닥뜨린 충무공의 리더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병선을 수선하지 않은 군관들, 심지어 이웃집 개에게 피해를 입힌 석수의 허술함에도 곤장으로 엄하게 군율로 다스리는가 하면, 북봉 신호대를 돌아보며 일꾼들을 일일이 격려한다. 거북선 제작용 돛베 29필, 방답에 이르러 기를 점검하면서, ‘전선(戰船)만이라도 온전하니 기쁘다.’는 데에서는 위기를 대처하는 충무공의 긍정적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4월11일 드디어 배가 완성되고 기막히게도 이틀 후 임진왜란이 터진다. 비변사로부터의 공문이 내려오기 전부터 水軍의 수가 적음을 노심초사 하면서도 배 만드는 작업을 해 왔던 충무공의 사전 준비가 없었더라면 임진왜란은 어떻게 종지부를 찍었을까? 그 열악함에서 건져 올린 23전23승은 세계사 어디에도 없는 불멸의 승전보라 하니 눈물겹다. 

   

  무술 연마, 때로는 활쏘기 내기에서는 누가 예순여섯 푼으로 이겼다는 식으로 매사 기록을 놓치지 않는다. 부산진 함락, 원균 수사와의 연통 및 백성들의 피난과 무기고 찬탈 등 남해의 온 섬이 무인지경이 되었다는 소식에 낙담하여 울분을 터뜨리는 가운데서도 ‘부사들마저 도주하니 민심이 흉해질 것을 염려하여 도망자 두 명을 찾아내어 목을 베다’ 등의 일벌백계로 다스려 소요를 막는다.

 

  그런가 하면 직급 여하를 막론하고 죽을힘을 다해 싸운 사람들이라며 부하들에게 공을 돌리거나 진급을 위한 장계를 올리는 등 수장으로서의 베풂도 넉넉하다. 선전관이 들고 온 임금의 유지에는 승전에 대한 치하와 격려 한 마디 없건만 몽진 중인 임금의 수레가 서울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신하 의 도리를 내 보이며 군량미 부족으로 인한 군사들의 사기진작을 걱정할 뿐이다.  

 

 늘 충무공을 헐뜯기만 하던 원균에 대해 속 타는 심정을 토로하면서도 묵묵한 모습으로 일관하며, 위기에 직면하지만 조정의 출동 명령만을 기다려야 하는 답답함과 군졸들이 비겁하게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음에 통탄해 한다. 조선의 원조 요청으로 전쟁에 합류한 명나라의 제독들이 어이없이 오만하게 굴었으나 옳지 못한 것에는 결코 굴하지 않는 충무공의 기백과 결연함에 명나라 장수들도 자세를 낮추었다.

 

 5월29일 해전에서는 ‘장수들을 격려하여 화살을 쏘고 총포를 쏘니 적들이 무서워 물러나는데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이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다.‘라는 일기에서는 피흘림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기품이 느껴진다.

 

 7월8일 한산도대첩 당일에는, 견내량 지형이 좁아 판옥선이 부딪치게 되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적선 73척을 유인하여 학익진을 펼치고, 지 현, 승자포를 쏘아 왜군의 사기가 꺾일 때 화살을 쏘며 돌진하는 것이 우레와 같고, 현감, 부사, 첨사 등 누가 왜놈들의 머리를 몇 급 베었는지, 몇 척의 배를 불태웠는지 등의 성과를 그 와중에도 정확한 숫자로 기록하고 있다. 연이은 안골포 해전에서는 42척 적선을 모조리 깨부수면 미처 도망 못 간 왜군들이 백성들을 괴롭힐 것이니 1리 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다는 데서는 눈앞의 공로보다 백성의 안전을 우선시 하는 헤아림을 볼 수 있다.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장사진을 친다’는 말이 바로 전법의 하나라는 사실도 일기를 읽으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장수들은 활쏘기로 자웅을 겨루고, 달빛은 배에 가득 찬데 수루에 홀로 앉아 근심했다는 것은 감당해야 할 싸움에 대한 근심이 아니었을런지. 충무공이 효자라는 사실 또한 일기를 통틀어 잘 드러나 있다. 늙으신 어머니 앞에서 보이는 흰머리카락 조차 불효이므로 굳이 자신의 흰머리카락 여나믄 올을 뽑아냈다는 충무공의 효심 앞에 참으로 부끄러워진다. 

  

  1597 년(정유년) 즈음 다섯 달간의 일기는 없는데 아마도 음모로 인해 충무공이 한양으로 압송되었던 시기로 일기를 쓸 수 없었던 듯하다. 그토록 일기를 빼곡히 썼으면서도 정작 수군통제사로 임명받았다는 자신의 명예에 관한 내용은 별다른 감회 없이 아주 짧게 한 줄 적고 있으나, 명량해전은 한산도 대첩과 같이 소상하게 적고 있다.

  수군의 열세임을 마다 하고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로 군사들을 독려했으며, 장수들에게 살려는 생각은 하지마라.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라고 하고 엄중히 경고한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지자총통을 쏘아 대니 바람과 우레와 같으며, 호각을 불고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 내리고 또 초요기를 올리니 김응함, 안위의 배가 오다. 안위에게 군법에 죽고 싶냐? 라고 하니 안위가 적선 속으로 돌입하다.‘라는 기록은 대본까지도 준비되어 있어서 영화 ’명량‘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읽는 내내 가슴은 두근대고 다리도 후들거렸다.

 

 안골포 해전에서도 자귀장 210명, 물건나르는 이 72명, 배에서 추위에 병들어 죽은 격군들 217명, 심지어 지휘선 출정. 재목 끌어내릴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였다는 기록들이 어찌 그리도 세밀한 지 충무공의 관찰력의 극치라고나 할까. ‘난중일기’가 세계기록유산이라 함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군사들이 입는 세 자락이 난 웃옷인 더그레를 색깔 별로 나누었다는 내용을 읽노라니 드라마에서 흔히 보았던 장면이 오버랩 된다.

 

 달아나는 거북함의 격군을 엄한 군율로 다스리고, 수루에 홀로 앉아 나랏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이슬 같다며 고뇌하면서도 물과 하늘이 한 빛이며 달빛을 비단결로 바라본다. 거문고와 피리를 벗 삼을 줄 알며, 서른 개에 불과한 유자를 친구 영의정유성룡에게 주는 순수함을 지녔는가 하면, 군비일체에 관한 철저한 회계에 이르기까지 정확함과 대범함을 두루 겸비한 분.

 

 일기 후반부로 가게 되면 장군의 건강이 많이 상함을 볼 수 있다. 이불솜을 흠뻑 적실 만큼 식은땀을 흘리고, 온종일 신음했다는 등의 기록이 상당히 많은데 지휘관으로서 힘들고 지쳤을 충무공은 그럼에도 늘 어머니와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세 아들들을 걱정한다. 냇물에 빠진 말을 아들 면이 잡고 있는 꿈을 꾼 바로 그 날 면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고 통곡하거나, 어머니의 부고를 접하고는 점차 삶의 무게에 지쳐가는 듯 ‘내가 무슨 죄로 이렇게 되었는가’라고 호곡하며 자신도 어서 죽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으니 그분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지.

 

 삶에서의 갈등과 경쟁은 늘 괴로운 일이다. 충무공 역시 주변의 모함 질투, 불신으로 인한 갈등을 겪었으나 올곧은 자기성찰로 주위와 소통했던 진정 위대한 지휘관이었기에 위기의 조선을 구한 불세출의 위인이며 영원한 자랑임을 다시 한 번 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