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품에 안고, 등에 업고(해외입양아 에스코트)

라일락74 2018. 4. 10. 18:20

                              

첫 해외입양아 에스코트 - 품에 안고, 등에 업고

  

    요즘에는 한 번이라도 다녀오지 않은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흔한 일이 된 해외여행이다. 그러나 해외여행이 가시화 된 것은 시기적으로 88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50 代 이상에게만 여권 발행이 일부 허락되었었고, 그 이듬해부터 전 국민의 해외여행 자유화 물꼬가 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다로운 visa 조건을 필요로 했던 미국으로의 여행은 visa 없이 떠날 수 있는 유럽과는 달리 그다지 쉽지 않았기에  visa 라는 걸림돌이 없어도 쉽게 다녀올 수 있는 유럽으로 너도나도 배낭여행 붐이 일기 시작했다. 

   

   전세계를 3차원 상의 그물망으로 쉽게 오가는 인터넷이라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니 종로 등지에 군집해 있던 여행사를 찾아가 항공권이랑 유레일패스를 티켓팅을 부탁하고 수령해야 했다. 그리고 여행사에서 얻은 EU 열차 시각표와 종이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떠나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여행사 패키지 여행상품도 별반 기억에 없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가슴 속에 늘 해외여행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독일 주재원으로 나가 있던 초등학교 동창이 한 번 놀러오라는 지나가는 인삿말에 꽂혀 꼭 그러겠노라 하고는 차일피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늘 빈약한 주머니 형편으로 인해 해외여행을 위한 여유가 별로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해외입양아 에스코트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귀동냥하게 되었다. 아기들을 양부모에게 데려다주는 일을 하는 대신 항공료를 지불해 준다는 것이다. 사전에 에스코트에 관한 상세한 정보도 없이 그저 공짜로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홀트아독복지회의 문을 두드렸고 마침내 연락이 왔다. 그러나 그 일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을 곧 알게 되었으니... 

 

  괴테박물관 - 프랑크푸르트   

  해외입양아를 데리고 가는 일은 어떤 상황에서였건 간에 친부모로부터 버려졌던 아기들이 좋은 양부모를 만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체적으로는 무척 고된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아동복지 기관에 300~400$ 정도의 기부금을 내야 했고 또 한 번에 아기들을 두 명씩이나 데리고 가야 했기 때문에 경비 면에서 크게 절약되는 것도 아니었다. 여행 일정도 내가 원하는 시기에 갈 수는 없고 입양과 맞물려야 하는 등 다소 불편한 점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베이비 에스코트를 신청하였다.

 

  나 역시 그 에스코트 일정에 나의 여행 일정을 맞춰야 했다. 891231.. 

생애 첫 해외여행의 꿈을 이루기 위해 6개월 된 아기 둘을 덴마크인 양부모들에게 데려다 주는 베이비 에스코터가 되어 여행길에 올랐다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 집을 나서 일찌감치 홀트아동복지회에 도착하였다. 이윽고 최소한 몇 달 정도씩 아기들을 키워 온 위탁모들로부터 아기들의 건강 상태와 습성 등을 전해 듣고 출발 직전 짧은 예배를 드린 후 아기들을 인계받아 기관에서 제공하는 승합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까지만도 5시간 이상 공항에 머물러야 할 만큼 긴 시간 동안 아기 둘을 데리고 이런저런 수속을 밟고 탑승하노라니 벌써부터 지쳤건만 앞으로 덴마크인 양부모들에게 인계해 주기까지는 거의 24시간 이상을 아기를 돌보아야 하는 셈이니 걱정부터 앞섰다. 막상 아기들도 탑승객의 일원으로서 갖춰야 할 것들이 다 있었으니, 이를 테면 여권이며 또 아동복지회에서 양부모들에게 보낼 서류 및 아기들이 입을 한복이며 기저귀 등 딸린 짐들도 각각 있는 데다 내 개인 짐까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인어공주 상 in 코펜하겐, 덴마크   파리 in France

 당시에는 두 명의 아기들을 에스코트 해야 했다.(그리고 몇 년 후 한 명으로 줄었긴 하다.) 암스테르담을 경유하는 KLM 항공이었기에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에서 코펜하겐 행 항공편으로 환승해야 하는데 Moving Walk로도 이동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하나는 업고 하나는 유모차에 태워 이동하는데 이미 기내에서도 우는 아기들 도우미 노릇에 에너지를 소진해 버린 탓에 완전 기진맥진했다.

 

  기내에서는 가장 넓은 공간인 화면 바로 앞좌석에 아기들을 재울 수 있는 임시 행거를 걸어주었으나 행동 반경이 좁은 기내에서 아기를 보살피는 일은 장난이 아니었다.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낳아 준 친엄마와 헤어질 때 이미 분리불안을 경험한 아기들이었다. 미처 애착 형성이 이뤄지기도 전 몇 달간이나마 자신을 안아 주고 먹여주던 위탁 엄마의 품을 다시금 떠나야 하는 불안 때문인지 아기들은 응가도 제대로 못 해 변비에 걸려 자주 울고 보챘다.

   단지 그 뿐이 아니었다. 아기들이 보채고 울면 전등을 끄고 수면을 취하는 승객들에게 여간 민폐가 아니어서,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두 명이나 되는 아기들을 기저귀 채우랴 분유 먹이랴, 우는 아기 안고 달래 주랴 파김치가 되어 있는 내가 측은해 보였는지 스튜어디스들은 나에게 자기들이 아기를 잠시 돌봐줄 테니 식사라도 하라며 고맙게도 아기들을 안아 주었다. 너무도 팔이 아프고 지쳐서 두 번 다시 에스코터는 하지 않겠노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이것이 신혼여행 이후 처음 타 보는 비행기와의 만남이었다.

 

     

 이렇게 힘들었으나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즐거웠다. 아기를 건네 받고 감사 기도를 드리며 아기가 너무너무 예쁘다며 'So cute!!'를 연신 날리며 좋아하는 양부모들을 보면서 아기들이 좋은 환경에서 양육될 수 있음에 감사했으며 한편 한국인으로서 너무 부끄러웠다. 입장을 바꿔 내가 다른 나라 아기들을 데려다 기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결코 자신이 없었다. 양친으로부터 버림받은 아기들이 새 가정에서 잘 자랄 수 있기를 바라며 양부모들과도 악수하며 헤어지니 그제야 내 세상이 온 듯 홀가분하다.

 

  그런데 그 날은 하필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 공항 근처 호텔은 빈 방이 없었으니, 더구나 밤 늦게 도착한 관계로 숙소부터 구해야 하는데 난감했다. 할 수 없이 인근 작은 가게에 들어가 여차여차한 상황을 설명하니 옆에 있던 한 크리스티안 얀 이라는 덴마크 인이 관심을 보이며 나만 괜찮다면 자기 집에서 머물 수 있게 하겠다며 말을 건네왔다. 귀가 솔깃했으나 어떻게 선뜻 그를 따라가겠는가? 나의 머뭇거리면서도 긍정적 반응을 포착한 그는 자신의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rice를 준비해 두라고 했다. 근처 집으로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 나에게 '당신이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며 돌아갈 때를 위해 길을 잘 익혀두라고 했다.

  마침 그는 꽤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리비아에서 3년간 근무하면서 당시 한국 기업인 대림건설 외에도, 金, 李, 朴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은 것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동화에서나 봄직한 하얀 커튼과 여러 개의 촛대 모양이 arch 형으로 된 고급스러운 촛대와 예쁜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인을 고려하여 만든 안남미로 지은 밥도 얻어먹고 그들 부부와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로 예상치 못한 많은 일들이 생겨 고생스러웠던 내 배낭여행의 시작이었다.

괴테 박물관 in 프랑크푸릍    

 937, 미국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다시는 하지 않겠다던 입양아 에스코트 프로그램에 또 지원했다. 아기 둘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울 게 뻔하고, 또 엄마를 따라 가고 싶다고 징징 대던 딸애를 이참에 데리고 가면 훨씬 수월하겠다 싶어 딸과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열두 살 딸애가 동생들을 돌보았던 다부진 솜씨로 기저귀도 갈아 주고 안아 주어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아기를 보살피는 일은 정말 너무도 힘들었다.

 

 입국의 첫 관문지는 시애틀 공항. 출입국관리원들이 길게 늘어선 입국자들을 수속하는 걸 지켜보노라니 이윽고 아기를 안은 내 차례가 왔다. 그런데 예의 주시하던 그들의 행동을 보며 뭔가 찝찝하던 내 기분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나를 열외 시키더니 입국을 허가할 수 없다며 어떤 연유로 한국 아기들을 미국으로 데리고 왔냐면서 거칠게 굴었다. 자기네들끼리 쑥덕거리며 빠르게 말하는 내용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리고는 딸아이를 불러 다른 줄에 서게 하고는 딸 애와 나에게 각각 질문 공세를 퍼붓더니 ‘Go back’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탑승객들이 수속을 받고 빠져 나간 한산한 로비에 우리를 세워 둔 채 줄곧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그네들의 꼴을 보면서 아기 둘을 안고 업고 진땀이 흘렀다.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짐은 또 잔뜩 한데.. 눈물부터 쏟아졌다. 미국인 양부모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백인 피부를 갖지 않은,  단지 미국 국적을 가진 히스패닉 계 이민 후예들이 대부분인 세관원들로 보이는데 그들도 백인에 대한 열등감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눈물을 보여서 그랬는지 한참 후 한국인 여성 사무원이 왔고 간신히 입국수속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 나중에 여러 사람에게 이런 난감한 경험에 대해 얘기하니 이런 경우 너희 나라 법의 도움을 받겠노라고 당당하게 말하였더라면 그들은 이라는 말에 하염없이 나약해진다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을 거라고 한다. 국력이 약하고 또한 자국민이 해결해 주지 못해서 버려진 아기들을 계속 미국으로 들여보내는 듯한 인상을 주었을 거라는데 이견이 없었다. 시애틀을 경유하여 LA에 도착하자 미국 측 입양기관 직원들(greeter) 들이 기내에까지 들어와 친절하게 아기를 받아들었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세관을 빠져나오니 양부모들과 그의 친구, 친지들이  사진을 찍고 일부는 캠코더로 영상을 찍는 등 환영 일색이었다.  새 가족으로 아기를 맞는 그들의 얼굴은 진심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 했다. 세관원들에 대한 기분 나쁜 이미지와는 달리 양부모들 일행은 모두들 친절하고 또 아기를 무사히 잘 데리고 와 주어 고맙다고 연신 Thank you를 보냈다.

 

 이제 해외입양아를 위한 에스코트 프로그램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나라에는 미혼모가 증가하고 있으며, 많은 아기들이 보육원으로 가거나 더러는 국내 입양이 되겠지만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하는 것 같다. 해외에 입양된 아기들이 성장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청소년기의 정체성 혼란은 그 어디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일진대, 하물며 외국에서 살며 외모가 전혀 다른 양부모와 비교하게 되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인격적인 대우와 교육을 받는 것 같다. 

 

 지금도 내가 데려다 준 아기의 양부모가 Facebook 에 올리는 사진들을 보며 그 아기들이 정말 씩씩하게 잘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아기를 데려다 주고 1년이 지났을 무렵 뉴욕 Long Island 에 살고 있는 그 양부모들이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아기의 생일파티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 날 파티에는 자신들의 친부모와 형제 자매, 친구들까지 모두 26명이 참석하여 아기를 축복해 주며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걸 보고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해외입양아에 대한 편견 보다는 그네들의 너그러운 마음을 먼저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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